난생 첫 '혼신의 연기' 이후, 드라마가 달리 보입니다

나의 낭독일기

by 희지

같은 낭독 수업을 듣는 예비 낭독가들의 단톡방이 있다. 초급, 중급, 고급 반으로 나뉘어진 수강생들을 한데 모아놓은 방인데 주로 낭독의 고수들이 활동을 한다. 그 단톡방의 주요 활동은 낭독 고수들의 '한달살이 낭독'이다.


한 달에 한 권씩 차례로 낭독을 이어간다. 처음엔 고수 낭독가들의 낭독이 너무 훌륭(?)해서 흥미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좋아하던 책이라도 낭독으로 듣기에 지루했던 책이 선정되면 꾀가 생기기도 했다. '초심자가 다른 사람의 낭독을 너무 많이 들으면 그 습관까지 따라 하게 되어 있어. 듣지 말자.'라는 나만의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꾀가 사라져 버렸다. 고수 선생님이 너무나 재미있는 청소년 소설을 '한달살이 낭독'의 책으로 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한 챕터를 듣고 난 이후,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이꽃님 장편소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였는데 그날의 분량이 끝나고 나면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사실 책을 빌려볼 수도, 사볼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낭독으로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매일 연속극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오전에 올라오던 낭독이 오후가 될 때까지 올라오지 않으면 얼른 올려달라며 은근 팬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뭐 어때, 하고 내질렀던 순간

아마도 그 책이 그렇게 재미있게 들렸던 이유는 소설이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대화체의 연속이라는 이야기였고, 내레이션이 아닌 인물의 목소리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얼마쯤은 연기를 해야 하는 낭독이었고, 고수 낭독가의 스킬은 바로 여기서 빛이 났다. 활자로 읽고 싶지 않을 만큼 주인공 '은유'의 캐릭터가 너무나 잘 표현되었다. 이 낭독을 듣고 있자니 낭독에서 연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중급반 수업에서 요즘 낭독하고 있는 '긴긴밤'에도 대화체가 많이 나온다. 즉 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에 우리 반 학생들 모두 인물의 구분은 커녕 캐릭터의 감정 변화도 살리지 못하고 책 읽듯이 읽어 내려갔다. 당연하게도 바로 NG. 중급반쯤 되었으면 캐릭터의 색깔은 입혀야 한단다. 노든은 노든의 캐릭터에 맞게, 치쿠는 치쿠의 캐릭터에 맞게 목소리 변주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될 리가 있나. 내 목소리로 읽는 문장들을 듣는 것이 이제 겨우 적응이 되어가는 중인데, 내가 하는 연기를 듣는다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나도 민망한데 듣는 남은 어떨까. 창피함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고집스럽게(?) 계속 목소리의 변주 없이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뭔가 마뜩잖기는 했다. 심심한 게 낭독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미 캐릭터의 감정에 빠져들었는데 내 소리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웠고.


그런데 그런 순간 있지 않나? 에이 뭐 어때, 하고 질러버리는 순간. 그날이 그랬다. 줌을 통해 나를 보고 듣는 시선이 여전히 쑥스러웠지만, 그냥 한번 나를 놓아버리고 선생님이 이끌어주는 대로 낭독을 해 보고 싶었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도 있어!……(후략) "


나는 그렇게 노든의 대사를 혼신(?)의 힘을 다해 내뱉었고, 무척 후련했다. 뭔가 나를 옭아매고 있던 것을 훌훌 내던지는 느낌이랄까? 왜 배우들이 캐릭터에 몰입했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하는지, 연극 심리치료가 왜 효과적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생전처음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다 보니 목소리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얼굴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고 손은 주먹을 꽉 쥔 채였다. 내 차례가 끝나고 나니 그제야 창피함이 몰려왔다. 정말 제대로 몰입을 했나 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업이 끝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녹음파일을 들어보았다. 그런데 웬걸! 분명 나를 내던지고 격정적(?)인 연기를 했던 것 같은데 녹음파일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평범했고 차분했다. 역시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은 쉽지 않나보다. 그런데 솔직히 나 이거 조금 재미있었다. 이젠 드라마를 볼 때도 배우들의 연기를 눈여겨볼 정도다. 전형적이거나 과하지 않으면서도 캐릭터를 살릴 수 있는 연기 스킬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중급반이 되면서 사실 고민을 많이 했었다. 이 낭독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에 띄게 나의 낭독이 느는 것 같지도 않았고, 수업은 힘들고 어려웠다.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던 찰나에 재미가 붙은 거다. 다음 주에는 중급반 수업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대화만 모아서 수업을 하기로 했는데 이것 또한 기대된다.


분명 또 어려울 것이고 마음처럼 잘 안 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 반 모두 쑥스러움을 이기고 각자의 노든과 각자의 치쿠, 그리고 각자의 펭귄을 마음속에 품고 이 수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짧은 책을 읽으면서 참 여러 번 벽에 부딪히지만 '인물을 품은 소리'라는 그 어려운 미션을 나는 오늘 조금 해낸 것 같았다. 낭독이 아니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이 깊은 여운이 아마도, 낭독의 묘미인가 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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