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튼서울 자서전
"이 전시는 스스로는 말할 수 없는 한 장소의 대필자가 되어 써내려가는 자서전으로, 40여년의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여러 층위의 이야기를 충실히 기록한다."
이름도 낯선 '건축물 장례식'. 2022년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하고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25년 5월부터 기나긴 철거작업에 들어간, 남산에 있었던 힐튼 서울호텔의 이야기다.
이 전시에 관심이 갔던 건 전시의 성격때문이었다. 40년이 된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 호기심이 일었다. 지난해 설립 30주년이 된 '분당성요한성당'의 '역사관'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했던 나로서는 건축물이 내는 목소리가 자못 궁금했다. 40년의 역사를 지녔다면 그건 건물의 생성과 소멸 뿐만 아니라 그 안의 사연과 스토리가 분명 존재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40년이 된 건축물이 내는 목소리가 장송곡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워낙 사라지는 것들과 낡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있는 나로서는 관심이 가는 전시였다. 철거중인 그 호텔의 흔적이 몽땅 사라지기 전에 가봐야겠다 마음먹고 나선 길. 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나선 길이 전시 종료 하루 전, 그것도 서울의 기온이 최저점을 기록하던 날이었다. 스산한 날, 폐허를 기록하는 전시라니 너무 썰렁한 거 아닐까 하는 우려와 함께 출발한 길.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전시장은 철거되는 힐튼호텔을 바라보고 있는 피크닉이라는 공간이었는데 우려와 달리 그 곳은 참 따뜻했다. 온도가 아닌 공간이 품고 있는 정서 말이다. 또한 철거되는 호텔의 마지막 인사라고 해서 마냥 감상과 추억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이 전시는 힐튼 서울의 역사. 그렇게 아무런 의례도 없이 철거될 수는 없다는 듯 정성스레 아카이빙한 힐튼 서울호텔의 이야기였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한번 들여다 볼까.
한국에서 노후건물은 법적으로 사용 승인 후 30년이 지난 건축물을 지칭한다. 그런데 힐튼 서울호텔보다 먼저 지어진 그랜드 하야트 서울(1978년 개관)이나 서울신라호텔(1979년 개관)도 아직 영업중인데, (법적으로 노후되었다고는 하나) 40여년밖에 되지 않은 힐튼호텔의 운명은 어쩌다 이리 된 것일까? 아무래도 계속되는 적자운영을 버텨내지 못한 탓이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은 건축물이 이렇듯 소멸의 운명을 맞은 건 아무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힐튼 서울은 시민들이 보존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지만 등록문화유산 제도의 50년 요건의 문턱을 넘지 못해 철거되었다.)
그나마 이대로 작별하기는 아쉬웠던 것인지, 힐튼 서울의 이야기를 문화유산으로 남겨두고자 한 사람들(비영리단체인 목목문화재단)이 이 이 전시를 기획했고, 이는 그대로 우리 사회에 건축물 보존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화두가 된 것 같다.
전시는 그러한 거대담론을 목적으로 하여 기획되었지만, 전시를 보고 난 느낌은 그보다는 힐튼 서울의 면면에 주목하게 했다. 전혀 몰랐던 힐튼 서울의 건축물 이야기에 관심이 갔으니 말이다. 거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적 공간인 호텔이 전근대 시대의 유물만큼이나 많은 스토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바닥은 트래버틴을 생각했는데, 그 빛깔이 뉴트럴, 그러니까 딱히 빛깔이라고 짚을 수가 없는, ... 다른 재료와의 조화가 쉬운 거. ... 곰보를 채우질 않고 그냥 쓰는 걸로 해가지고 썼고."
-김종성, 『김종성 구술집』, 도서출판 마티, 2018-
"산피에트로 대성당 같은 로마 건물에 가면 90% 이상이 트래버틴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나는 시간을 초월한 타임리스 재료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2천 년 이상 유지된 트래버틴을 선택한 거죠. 이와 대조된 재료가 없을까 눈여겨본 게 알프스에서 채석한 녹색 대리석, 베르데 아첼리오입니다. "
-김종성 인터뷰, 임나리 진행,『건축가 김종성과 건축적 유산』(ONE O ONE plus,2021),7 에서 인용-
김종성은 힐튼 서울을 네 가지 재료로 설명했다. 트래버틴, 녹대리석, 브론즈, 오크. 그는 많은 재료를 사용하는 대신, 시간이 스며들 수 있는 재료를 선택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트래버틴이었다. 트래버틴은 닳고 변색되며, 그 마모 자체가 건축의 일부가 되는 재료다. '건축이란 완성되는 대상이 아니라, 사용되며 서서히 깊어지는 존재에 가깝다고' (김종성, 『김종성 구술집』, 도서출판 마티, 2018) 생각한 건축가의 소신은 철거되는 건물 앞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천년도 간다는 재료를 가져다 바닥에 깔았는데 그것을 40년만에 철거하게 될 줄을 그는 알았을까.
그래도 이 전시가 성공적이라고 여긴 이유는 비록 건물로서의 힐튼 서울은 없어졌지만 이 전시를 통해 힐튼 서울의 역사와 정체성이 새로이 정립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전시는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은 아날로그의 총집합체였는데 그가 손 스케치로 남긴 두툼한 설계 스케치와 설계도면, 인화된 옛 사진들과 수백장의 네가필름, 호텔의 아날로그식 열쇠들과 손글씨로 작성된 장부와 직원교육지침서까지. 그야말로 80년대 건물의 잘 정돈된 역사관을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전시 내내 힐튼서울의 많은 시그니처들이 아쉬움을 불러일으켰지만 전시가 가장 힘주어 강조했던 것은 힐튼 서울의 시그니처같은 공간인 '그랜드 아트리움'이라는 공간이었다. 20세기 한국 현대건축이 구현할 수 있었던 공간적 품위를 상징한다는 힐튼 서울의 '그랜드 아트리움'은 지하 1층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18m, 메인 로비 입구에서 반대편 끝까지의 깊이가 64m가 되는 위로 열린 공간으로, 이 공간은 힐튼 서울의 사유가 가장 응축된 장소였다.
단순한 로비가 아니라, 재료와 빛, 구조가 하나의 질서로 호흡했던 공간(김종성, 「모더니즘 건축물 서울 힐튼의 탄생」, 『힐튼이 말하다』, 램프북스, 2024)이라는 '그랜드 아트리움'은 이제 힐튼 서울의 철거 이후 그 자리에 들어설 '이오타 서울원'에서 재현할 계획이라고 한다. 물론 그 아트리움은 시간의 의미를 더해가는 '낡음' 대신 '새로움'을 입고 있겠지만 말이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데 어느새 힐튼 호텔의 이미지가 마음 속에 남았다. 건축물이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이것을 문화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 전시는 힐튼 서울이라는 건축물에 정체성과 구체성을 입혀 역사와 문화로 남을 수 있게 했다. 기록되고 보존된 모든 것이 가치있는 역사는 아니겠지만, 기록과 보존이 있기에 이처럼 백년도 못되어 철거되는 건축물에 대한 가치가 남는 것일 것이다.
문득 30년이 넘으면 노후된 건물이라는, 50년이 넘으면 등록문화유산이 된다는 법적인 지위 말고 현재를 함께 살아내고 있는 건축물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씌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간직해온 탄생 스토리와 건축의 스토리가 합쳐 그 건축물의 정체성이 되는 순간, 그 건물은 단순히 건축물으로서가 아니라 헤리티지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