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보기 좋은 두 전시,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진 호작도의 향연
디자이너 지춘희는 이런 말을 했었다. "여행의 매력은 다른 날이 되는 것"이라고. 거창하게 짐을 꾸려 나가지 않아도,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가서 다른 날을 만든다면 그게 바로 여행이 아니겠냐고. (출처: 중앙선데이, 2025.09.27)
그 멋진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종종 여행을 떠난다. 혹자는 외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여행이다. 그렇게 신발을 신고 나선, 오늘 나의 여행의 테마는 '까치 호랑이'. 무릇 정초 아닌가. 2026년 새해의 기운이 요동치는 이 때, 비록 영하 11도의 칼날같은 날씨였지만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보겠다는 나의 발걸음을 뜨거웠다.
사실 오늘 여행의 테마를 잡은 건 며칠 전 한 오래된 병풍 사진을 보게되면서부터였다. 보통 조선시대의 병풍하면 '십장생도', '화조도', '책가도', '일월오봉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병풍의 모습이었다. 8폭 병풍 가득 호랑이 털이 살아있는 듯 그려진 그림. 바로 '호피도'.
'어, 대체 이게 뭐지?'
이 신기한 걸 내 눈으로 직접 봐야했다. 그렇게 부랴부랴 찾아나선 길. 전시를 진행중인 '갤러리현대' 본관 1층에 들어서면 전시장 한가운데를 가득 메우고 있는'호피도'가 나를 맞아준다. 정말이지 조선시대의 그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이 장엄한 그림의 첫 인상은 군더더기 없는 세련됨과 고급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 그림을 보고 추상화가 떠올랐다는 혹자의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런데 '호랑이'라는 큰 주제로 묶였지만 호랑이 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민화 아니던가. '호피도'를 전면에 내세우긴 했지만 해학적인 '까치 호랑이' 민화를 비롯해 조선시대 민화 27점을 전시한 이 전시에서는 한쌍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쌍룡희주도'를 비롯한 궁중회화와 민화의 조화가 다채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전시,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 '화이도'의 진정한 매력은 그 변주에 있었다. 갤러리현대 신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서 전시중인 '화이도'는 색감의 조화와 재료의 변주, 책가도의 추상적 표현 등 어렵지 않고 직관적인 작품이어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전시다. 민화의 전통을 현재의 눈으로 재해석한 현대 작가 6명의 작품 75점이 걸렸는데 익숙한 주제의 현대적 변주가 무척이나 경쾌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이 갔던 작품은 김지평 작가의 '초혼'이었다. '초혼'은 현대판 호피도. 옛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혼례때 신부의 가마에 호피를 씌워 액운을 쫓았다고 하는데 작가는 한땀한땀 직접 그린 그 호피도 옆에 나란히 연지곤지를 상징하는 붉은 점을 찍었다. 백미는 그 두 그림 사이에 쓰인 글씨.
"나의 넋에 발이 있다면 너의 집 앞으로 가는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으리."
조선 여성 시인의 연시를 연필로 적었다는데 그 감성의 깊이가 아득했다. 권력의 상징인 호피도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여성의 시가 어우러진 스토리가 마음 속을 휘저어 그 그림 앞에 한동안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 혹시 타임슬립의 매개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초혼'이 워낙 강렬하긴 했지만 다른 작가의 그림들에서도 독창적 개성이 뿜어져 나왔다. 이두원 작가의 '소나무 아래 도깨비 호랑이와 까치'는 작가가 인도와 파키스탄 네팔 등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천연재료를 사용하여 인상적이고 강렬한 '호작도'를 만들어냈으며, 안성민 작가의 자작나무로 만들어 붙인 입체적인 '구름물' 족자도 흥미로웠다. 파독 간호사 출신 화가 노은님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 박방영 작가의 산수풍경화는 동화적인 색감도 인상적이었지만 '나를 찾아 지나온 純度길' 이라는 문구때문에 수수께끼같은 그 그림을 계속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본관 전시 2층에 가득 걸린 병풍들, '책가도', '십장생도', '일월오봉도' 등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무도 없는 전시장에 왠지 상서로운 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병풍 앞에서 두 팔 벌려 기운을 받고 있는데 문자가 한통 도착했다.
"엄마, 나 oo고 됐어"
이 날은 둘째의 고등학교 배정 발표일. 변수가 많았다던데 운 좋게 1 지망고에 합격한 딸의 문자를 보고 있자니 역시 좋은 기운을 가득 받은 덕이었나 싶었다. 그런데 좋은 기분을 안고 전시관을 나서면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오늘 여행의 테마인 ‘까치 호랑이'를 마무리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엄청난 내면의 갈등.
날은 춥고, 몸은 피곤하고, 허기는 밀려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의 소리가 요동쳤지만, 무릇 여행의 미덕은 깔끔한 마무리에 있는 법. 나는 결국 삼청동을 떠나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향했다. 케데헌이 전 세계를 휩쓸었던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전시 '호작 : 까치 호랑이의 세계'를 보기 위해서.
칼바람을 뚫고 도착한 리움 미술관 상설전시관은 시각적 만족감 탓인지 '호작도' 가득한 전시장의 길한 기운 때문인지 역시나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일명 '피카소 호랑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였던 호돌이의 모티브여서 그랬는지 낯이 익다. 뿐만 아니라 1952년에 제작된, 한국의 '까치호랑이' 그림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호작도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고. 망설이긴 했지만 정초에 이렇게 다양한 호작도들을 만나고 나니 비로소 오늘 여행의 마무리가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다녀오길 잘했다.
곧 설이다. 액운을 쫓는 호랑이와 길상인 까치의 좋은 기운을 받고 싶으신 분께 이 전시를 추천한다.
<전시정보>
갤러리현대의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와 '화이도'는 2월 28일까지. 무료.
리움미술관의 '까치 호랑이의 세계'는 상설전시. 무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