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침묵이 익숙해지는.
밤새 하얀 눈이 내렸다. 새벽 길이 하얗게 얼었다. 날씨도 추워서인지 이면도로가 하나도 녹지 않았을뿐더러 발자국도 몇 개 없다. '날이 밝으면 우리 딸도 나가서 눈 오리를 만들자 그럴 텐데, 오늘 많이 춥지는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이 안 보였다. 9시가 지나고 10시가 되어도 꼬마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는커녕 눈을 밟고 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 집 아이들도 눈에 시큰둥이다. 올 겨울에 아무리 눈이 흔했다기로서니, 그래도 동심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새 눈놀이가 시들해진 건가?
그렇게 밖에 내린 눈은 그저 감상용인 듯, 치우기 귀찮은 애물단지가 된 듯 그렇게 여전히 관상용으로만 하얗게 빛났고, 우리 아이들은 나름 바쁜 겨울방학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학원으로 뛰어갔다.
코로나로 늘 집에 있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 요즘은 주변이 더 고요해진 것만 같다. 5인 이상 집합 금지의 위력이 대단한 것인지 아이들로 늘 왁자지껄하던 단지가 너무나 조용하다.
단계가 내려가면 그래도 한두 번 얼굴이라도 보곤 했던 사람들의 연락이 뜸해진 것은 물론, 한 두 번씩 가던 학교에서 몰려나오던 아이들의 모습도 볼 수 없어서인지 정말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어졌다.
우리 집 아이들만 나가지 않는 게 아닌 듯 밖에 아무도 없다. 사람이 없다. 이젠 누군가 마주쳐도 마스크를 쓰니 알 수도 없겠다 싶다.
요즘 카톡을 보고 있으면 광고 이외에는 알람이 잘 울리지 않는다. 처음 코로나가 터졌을 때는 카톡 알람이 초단위로 울려댔고, 그 후에도 일정 부분 갑자기 단절된 생활에 적응하려고 단톡 방이 바빴다. 잘 지내라는 당부가 고마웠고, 당연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단톡 방도 개인이 주고받는 톡방도 모두 잠잠하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딱히 "잘 지내고 있어?"라는 말 이외에는 할 말도 없는 탓에 안부를 묻기도 참 그렇다. 5인 이상 집합 금지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할 말이 더 많더라고, 매일이 아니라 일 년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너도나도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불편하던 5인 이상 집합 금지와 거리두기에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새 적응을 해 버린 듯하다. 그렇게 소식을 몰라도 더 이상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은 시간들이 내 주변을 낯설게 흐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코로나가 주는 불편함을 은근히 반기는 쪽이었다. 집에서 혼자 책도 보고, 그러다 나른해지면 낮잠도 자고, 그러다 찌뿌듯해지면 산책이나 달리기를 하는, 혼자 사는데 최적화된 삶의 리듬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내가 코로나로 불편했던 건 온 식구가 북적북적 집에 있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 정도였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아쉽다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솔직히 굳이 만나지 못해서 편했다.
코로나 시대에는 '인싸'보다 '아싸'가 더 적응력이 높다든가, 내성적인 사람들의 재발견,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은근 뿌듯하기까지 했다. 세상이 은근 아싸인 내 취향을 응원한다는 것 같은 자아 도취감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오늘 눈 왔어요! 애들 잠깐 놀릴 수 있어요?" 하고 묻는 문자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답답한데 커피 한잔 하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좋은 전시회가 있던데 같이 보러 가자."라고 청해 오는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심지어 "잘 지내고 있어?"라고 물어주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나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홀로 쓰는 내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현실에 느껴지는 이 야릇한 공허함은 내가 홀로 상상해왔던 혼자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외로워졌다.
늘 침묵은 금이라고 배웠고, 말을 하지 않아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은 쓸 데 없는 수다마저도 그립다. 이래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했나 보다.
혼자가 익숙해진다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TV 소리라도 틀어놓아야 외롭지 않다는 우리 엄마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왁자지껄함이 사라진 올 겨울에 나는 '함께'의 가치를 되새긴다. 혼자가 좋더라는 방정일랑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이런 삶에 어느덧 익숙해진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있을까.. 문자라도 넣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