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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Feb 18. 2022

어느 채식주의자의 날고기 예찬

빈혈을 예방하고 기력을 보하는 육회, 그런데 좀 미안하네요..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비건이 되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고, 나는 이른바 플렉시테리언이 되었다. 실은 말이 좋아 플렉시테리언이지 그냥 고기를 예전보다 적게 먹는다는 뜻에 가깝다. 한 사람의 완벽한 비건보다 다수의 고기 섭취를 줄이는 것이 환경에 더 좋다는 어느 채식주의자의 선언에 힘입은 바 크다.


그렇게 '고기 소식주의자'가 되었는데 문제는 새롭게 맛 들인 고기가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고기가 예전처럼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환경을 생각하더라도 바람직한 변화였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가 않았다. 너무 기름지거나 혹은 지나치게 퍽퍽한 다른 고기와는 다르게 감칠맛이 도는 고기. 게다가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샘솟게 하는 비주얼은 또 어떻고. 이 날것을 보고 도는 낯설고도 생생한 식욕이라니.


최근 몇 년 전부터 나의 '최애 음식'의 하나로 자리 잡은 '육회'와 '육사시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쩌면 소극적 채식주의자의 부끄러운 자기고백이 될지도 모르겠다.


'육회'는 소고기 살을 채 썰어 소금과 마늘, 참기름에 양념한 것이고, '육사시미'는 소고기 살을 회처럼 썰어 양념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한다. 육회와 육사시미중에 비교적 흔하게 접했던 것이 '육회'였다면 요즘 새롭게 맛을 들인 것은 '육사시미'이다.


소고기를 얇게 썰어 참기름에 듬뿍 찍어 마늘과 함께 먹는 맛은 고기를 굽거나 끓일 때의 맛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구운 고기에서는 특유의 냄새와 맛이 나는데 여기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또 조리한 고기는 약간 질기거나 혹은 기름진데 비해, 육회나 육사시미는 부드럽고 담백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소고기에서 연상되는 익숙한 맛이 아니어서 더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육사시미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육회를 먹을 때보다 접근이 쉽지 않았다. 생선회처럼 썰어진 시뻘건 소고기 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사바나 초원의 사자라도 된 것 같은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다 보니, 육회보다는 육사시미쪽으로 젓가락질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암튼 별미다.



날것의, 선연한 핏빛에 육식에 대한 미안함이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탄소 배출, 환경오염, 동물복지 등의 다양한 이유로 채식에 대한 의무감이 생긴 것이 좀 걸렸다. 육식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자칭 '절반은 채식주의자'로 살면서 신념과 배치되는 이런 고기 예찬을 하자니 좀 부끄럽기도 하고. 미식가로서 살기에는 지구환경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새로 맛을 들였다지만, 그리고 아이들의 단백질 섭취를 위해서라지만 당연하게 식탁에 오르는 고기가 이번엔 유난히 미안하다. 아마도 너무나 선명한 핏빛 고기를 보니 육식에 대한 나의 무신경함이 조금 거슬렸나 보다. 게다가 요즘은 신념을 소비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는 미닝아웃((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벽장 속에서 나온다는 커밍아웃(coming out)이 결합된 단어)) 시대 아닌가.


아무래도 오늘은 이 음식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미닝아웃 세대들이 즐겨 찾는다는 '대체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먹거리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의 가치를 오늘 식탁의 토크 주제로 삼아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죄책감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그 아쉬움은 아이들에게 지금 먹는 먹거리들에 대해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해 줄지도 모르겠다.


철분이 가득 들어있어 빈혈을 예방하고 기력을 보강한다는 육회나 육사시미는 사실 자주 먹게 되는 음식은 아니다. 어쩌다 몸이 너무 허하게 느껴지는 날 먹는 음식으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의 특별식에 가깝다. 그러니 보약밥상으로 준비한 오늘만큼은, 죄책감을 덜고 맛있게 먹어야겠다. 참, 날고기를 먹고 난 후 며칠 뒤엔 꼭 구충제를 섭취하시길 권한다.


<육회 준비하는 법>

1. 정육점에서 육회용 고기를 산다. (채 썰려있는 것으로)

2. 고기를 키친타월로 톡톡 두드려 핏물을 닦아낸다. 건조하다 느껴질 때까지.

3. 얇게 채친 마늘을 잔뜩 넣고 소금과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양념한다.

4. 배를 채 썰어 곁들이고 계란 노른자에 찍어 먹으면 맛있다.


<육사시미 준비하는 법>

1. 정육점에서 육사미용 고기를 산다. (사시미용으로 썰어주신다)

2. 키친타월로 톡톡 두드려 핏물을 닦아낸다.

3.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다.

4. 적당한 종지에 마늘을 많이 넣고 참기름을 넉넉히 붓는다. 이때 마늘은 편 썰어서 넣어도 되는데 통마늘을 칼 옆면으로 꾹 눌러 으깨면 젓가락질이 더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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