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나에 대한 불안 내려놓기, 갱년기 잘 보내는 꿀팁입니다.
"엄마, 그렇게 하는 공부는 오래 못해.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하잖아."
방학인데 학원이 없는 날, 침대에서 뒹구는 아이에게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다가 돌아온 대답에 머쓱해지고 말았다. 내가 무심결에 했던 말은, 다름 아닌 "OO이는 어떻대~"로 끝나는 '비교'였다. 음... 나도 안다. 잘못했다는 걸. 모두가 하지 말라고 강조해 마지않는 말,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바로 그 말이니까.
"요즘 애들 장난 아니래. OO이는 요즘 독서실에 하루 종일 있는다더라!"
은근한 부추김이 섞인 무심한 말투로 이렇게 건네면, '정말? 하며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다. 그뿐이랴, 불안에 흔들리는 동공과 질투심에 불타는 눈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책상과 한 몸이 되는 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너무 시큰둥했다. 어? 이게 아닌데..! 아무래도 나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것 같아, 또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그런데 이런 얘기 들으면 막 공부하고 싶어지고 안 그래?"
추궁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런데 아이의 반응이 이전과 좀 달랐다. 늘 이런 이야기 끝엔 짜증이 따라붙었는데 이번엔 조용히 '설득'이라는 것을 하는 게 아닌가.
엄마가 주는 그런 자극에 하나하나 반응하다가는 공부하기가 더 힘들 것 같다고. 그러니 엄마도 이제 그 방법을 그만 쓰는 게 어떻겠냐고. 그 말을 듣는데 문득, 딸이 조금 멋져 보였다.
엄마의 불안에 좌지우지되지 않겠다는 아이
▲ 나의 지칠 줄 모르는 불안을 사전에 차단하는 스킬은 두고두고 칭찬할 만하다.
나의 예전을 돌아보면, 나를 움직인 동력은 팔 할이 '불안 심리'였다. 예민함을 넘어 초민감한 성격이었던 나는,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온갖 자극에 모두 반응했다. 예민하다는 말이 칭찬보다는 비난에 가까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참 티 나지 않게 예민하느라 늘 진이 빠졌다.
그런데 그 불안한 심리가 꼭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워낙 경쟁이 치열한 사회 아닌가. 아마도 가벼운 강박이나 불안 증세가 정신적인 긴장을 유지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 다이내믹한 나라에서 버텨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버티다 보니 조금씩 더 강박적인 성격으로 변해 버렸을지도.
어쨌거나 이런 성격의 내가 아이를 키웠으니 어땠겠는가. 모성과 결합된 불안심리는 최고의 시너지를 냈다. 불안은 나의 급한 성격과 맞물려 자꾸 조급하게 결과를 보려 했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속상해 했다. 불안한 사람에게 만족이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우울이 찾아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이런 우울에는 약도 없다. 그저 내 마음을 바꾸는 수밖에. 엄마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내려놓는다'가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부터 시작된 '엄마의 욕심 내려놓기'는 고3 때까지 이어진다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 게다가 잘 내려놓지 못할 경우 갱년기에 무기력함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 면에서 언젠가부터 비슷하게, 나도 열심히 '내려놓기'를 하는 중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불안과 강박까지 포함해 전부를 내려놓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걱정과 아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내 불안의 원인일 테지만 아이는 아이고 나는 나다. 아이의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나의 책임일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어린 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첫째가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일단 나의 지칠 줄 모르는 불안을 사전에 차단하는 스킬은 두고두고 칭찬할 만하다.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 가서 그 버릇을 고쳤겠는가.
엄마의 불안에 좌지우지되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아이로 인해, 나는 어쩌면 오래된 불안과 강박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 불안이라는 걸 덕지덕지 붙이고 있으면 매 순간이 힘들고 지친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도 힘든데, 그 거추장스러운 감정까지? 나도 이제 버겁다. 이젠 아이도 벌써 저렇게나 자기 생각이 뚜렷해졌으니 이제 그만 나의 과도한 관심을 거둘 때도 된 것 같다.
백종원처럼 '척' 하며 살아볼까?
▲ 아이는 아이고 나는 나다. 아이의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나의 책임일 수는 없다.
물론 아이가 가져오는 그 모든 결과를 믿어 주고 웃어 주고 기다려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딸의 사춘기와 나의 갱년기를 편안하고 조화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마다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또 고개를 드는 불안. 내가 진짜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 40년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걱정되지만 나를 믿고 아이를 믿어 보자. 걱정하고 불안해 하느라 내가 꿈꾸는 여유 있고 품위 있는 노년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잘 되지 않는다면 그냥 마음이 넓은 척이라도 해 보는 거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외식사업가 백종원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착한 척, 겸손한 척, 멋있는 척. 처음엔 허언이고 허세라도 일단 내뱉고 나면 보는 눈들이 무서워 행동이 따라가요. 어찌나 효과가 좋은지 제 인생 모토가 '척척척'이 됐어요. 하하하" - <일터의 문장들>, 김지수, 2021
욕심 없는 척을 했더니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며 웃는 그를 보고 따라 웃고 싶어졌다. 이렇게 진심을 담은 '척'이라니. 이제부터 나도 '척' 좀 해볼까? 불안하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여유로운 척을 하다 보면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정말로 그런 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