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참는다 해서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아픔을 참는다 해서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뜨거워지는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해도
나에게 비치는 세상은 하얗게 흐려진다.
고통에 울부짖어야 상흔을 마주할 수 있다.
차올랐던 눈물을 저 아래로 흘려보내야
나를 둘러싼 풍경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울림 없는 격통은 나를 더 곪게 만든다.
스타트업에서의 나는 대표를 제외한 모든 자리에 위치했다. 이제 막 시작한 소규모 스타트업에서는 차별점이자 단점이었던 비전공자란 특징이 빛을 발했다. 모션 그래픽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촬영 및 편집, 작문, 약간의 마케팅까지 겸했다. 조금이나마 경영 지식도 있었기에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IR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회사의 크기가 점점 확대되면서 직원의 수도 늘어났다. 담당하는 업무는 변함이 없었지만 늘어난 인원만큼 인사 관리가 포함됐다. 이전 경력이 없었던 나는 처음 겪어보기에 많이 미숙했다. 개인마다 맡게 될 업무에 대해 교육하고 KPI를 할당하면서 본래의 업무를 수행했다. 괴로움은 중첩되어갔지만 시선을 돌려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내가 겪는 아픔은 팀원들도 공유하는 고통이 되었다. 회사 차원에서 신입 직원의 교육은 권장하지 않았지만 자의로 이행했다. 입사 이후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타인이 겪지 않기를 바랐다. 팀원들은 목표로 하는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시켰다. 하지만 초기에 설정했던 비즈니스 모델에서 벗어나는 업무들이 강제되며 권한 밖의 일들이 쌓여갔다. 회사를 상대로 방향성을 다시 바꿔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내가 힘들어지면서 팀원들도 함께 지쳐갔다.
더없이 참을 수 없는 격통에 벗어난 지금에도 진통은 남아있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인내했던 것에 대한 반동은 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작부터 함께 해온 회사에 대해 배신감이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팀원들에게 미안했고 나 자신이 미워졌다. 감정이 더 부풀어 오르기 전에 퇴사를 결정했으면 덜했을까. 참고 또 참으면 나아질 줄 알았다. 어리석고도 우매했다. 참는다고 해서 아픔은 가시지 않는다. 퇴사 후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새로운 시작이 망설여진다. 이전과 같은 경험을 반복하지 않을까,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엮일 수 있을까, 지난번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기에 머뭇거린다. 자신이 없기에 확신이 없다. 쓰라린 상처를 드러낼 수 없어 자신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아직도 통증에 울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아픔을 참는다 해서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