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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Oct 30. 2016

레지스탕스 선배를 떠올리며..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게이

은 가죽자켓과 레지스탕스     

  

  대학 입학 후 폭풍 같은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나니, 어느새 망가진 성적표와 권태로운 일상들만 남아있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자취생활은 방종을 낳았고, 그와 동시에 찾아왔던 나태함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성적표만을 던져주었다. 1학기의 끝 무렵, 본격적인 공부는 제대 후에 하는 것으로 잠정타협(?)을 했기에 학점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연애를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마 연애도 한 번 못해보고 군대에 끌려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2학기에는 반드시 연애를 하리라 다짐하면서 ‘성(性)과 결혼’이라는 교양강좌를 신청했다. 매 학기 수강생의 절반 이상이 여자이며, 팀 프로젝트로 진행되어 ‘썸’이 반드시 생긴다는 한 선배의 조언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들렸다. 수강신청 당일 그처럼 빨리 일어났던 적도, 그처럼 빠르게 클릭했던 적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강의 첫 시간. 절반은 웬걸, 강의실의 70% 이상이 여자인 것 같았다. 더구나 작년까지 교재가 원서였던 것에 반해 올해는 한국어판으로 수업이 진행된다고 하여 학점 취득도 쉬울 것 같았다.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을 보며 누구랑 같은 팀이 되었으면 좋겠냐며 친구와 함께 행복한 상상도 나누었다. 이번 학기는 여자 친구도 사귀고 학점도 올리고..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아. 나에게도 봄이 오는가. 그런데, 수업 첫 시간부터 뭔가 좀 이상했다. 교수님께서 강의계획서를 ppt로 띄워놓고 한 학기 배울 내용을 설명해주시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강좌명이 ‘성(性)과 결혼’이라서 ‘대학생의 성교육’쯤인 줄 알았는데 사실 이 수업은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남녀의 성역할과 그 원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여성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서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이전까지 아름답게만 보이던 여학생들이 모두 독립투사처럼 눈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방향이 다르고 뭔가 있으면 안 될 곳에 와있다는 생각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으니까. 학점은 그렇다 치고 좋은 인연만 만들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짧은 숏컷에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쌍꺼풀 없는 눈매에 앙다문 일자 입술, 무표정한 얼음공주 같은 이목구비를 가졌던, 작은 체구에도 꽤나 인상적인 새까만 가죽자켓을 입고 있던, 같은 팀 조장이었던 ‘레지스탕스 선배’였다.

  

  친구와 나는 그 선배를 ‘레지스탕스’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에 쉽게 웃는 법이 없었던 선배는 과제에 대해 논의할 때나 일상 대화를 할 때에도 굉장히 논리적이고 비판적이었다. 물론 모든 사안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특정 이슈/단어에 대해서는 마치 사회 부조리에 전면으로 항거하는 ‘레지스탕스’처럼 온몸으로 열변을 토해내곤 했다. ‘인종’, ‘평등’, ‘차별’ 같은 단어가 그 선배의 anger trigger였고, 강의교재가 그러한 단어들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조모임 시작 전 ‘제발 오늘은 무사히..’ 라며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지스탕스 선배는 다른 팀 발표 중에도 번번이 손을 들어 질문했는데, 날카로운 논리로 속살을 후벼 파는 질문은 그 어떤 팀도 피해갈 수 없었다. 뭔가 선배의 trigger를 건드리는 내용이 나온다 싶으면 불길한 예감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질.문.있.습.니.다’라는, 약간은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어김없이 확인되곤 했다. 한 번은 다른 팀 복학생 선배가 나에게 따로 찾아와 제발 자제해달라며 부탁을 할 정도였으니. 덕분에 우리 팀은 질문공세를 통해 다른 팀 학점을 노략질하는 해적단으로 악명이 높았고, 어느 누구도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다. 좋은 인연을 만들긴커녕 목에 현상금이 붙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아, 선배가 있어 좋은 점이 있긴 있었다. 우리 팀이 발표할 땐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는데, 발표자가 레지스탕스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상상했던 조모임 분위기                                                                                                현실 



  선배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남녀평등’이었다. 다른 trigger에도 민감한 건 마찬가지긴 했지만, 남녀평등에 관련된 문제라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부터 시작해 유리천장, 유교문화, 호주제, 가부장제, 성역할, 성차별 등등 수많은 이슈를 소환하면서 일장 연설을 펼쳤다. 그럴 때마다 선배 앞에서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았고, 미안한 감정까지 들 정도였다. 사실 한 두 번 대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나 또한 ‘인권’, ‘평등’과 관련된 이슈에 관심이 많았고 책도 많이 읽었던 터라 어느 정도 교집합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제대로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이 ‘넌 어쨌거나 남자고, 이 사회에서 특권을 가진 계층이고, 그래서 여자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까만 가죽잠바가 시그니쳐 드레스signature dress였던 레지스탕스 선배. 그 선배는 나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날카로운 칼날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든지 남자들의 엉덩이를 걷어찰 준비가 되어 있는, 진정한 변화는 행동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xy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굉장한 특권을 가진 나와 내 친구는 한 학기 내내 선배의 칼끝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도 노력했던 것 같다. 1학년 2학기, 같은 조의 조장이었던 레지스탕스 선배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었던 열혈 페미니스트였다.

     

  군 복학 후 한참을 잊고 있다 최근 들어 불현듯 레지스탕스 선배 생각이 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여혐 문제가 대두되면서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가 불붙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과 관련된 일련의 사회현상을 지켜보면서 지금에서야 레지스탕스 선배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때 그 선배는 왜 그렇게 열변을 토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래서 그 선배의 방법이 괜찮았던 것일까. 그게 페미니즘을 실현하는 방법이며, 페미니스트가 되는 길일까. 페미니스트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어봤지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오늘 소개할 책이 가장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록산게이Roxane Gay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소개한다.



스칼렛 요한슨은 왜 쫄쫄이만 입을까     

  

 「나쁜 페미니스트」는 저자의 블로그에 올렸던 에세이를 모은 책으로 페미니즘, 인종차별 등과 관련된 총 33개의 이슈를 본인만의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문화비평가인 저자의 이력을 반영하는 듯 대중매체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며 주장을 펼치는데, 그중 대중매체 컨텐츠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꽤나 일관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저자의 의하면 현재 우리 사회의 대중매체 텍스트는 다분히 남성적이며 그 구조 안에서 여성이 제한적으로 다뤄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주류 컨텐츠에서 여성의 이미지나 역할이 가부장적 시선 아래서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주목하며 남성들의 요구와 관점에 따라 편집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주장은 드라마, 영화, 혹은 문학작품 속에서 여성이 주변화 되거나 남성 캐릭터를 위한 성적인 요소로 활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로 설득력을 얻는다.      


여성을 남녀 차별적이고 멍청하고 한심한 방식으로 그린 형편없는 텔레비전 쇼가 널리고 널렸다. 영화판은 더 심해서 영화에서는 여자 캐릭터를 만들 때 한두 가지 아이디어 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여성을 캐리커쳐처럼 과장한 다음 그 캐리커쳐를 우리 목구멍까지 밀어 넣으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대중문화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여성을 보게 되면, 이를테면 S사이즈 옷을 입지 않거나 남자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는 여성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 한 작품에 열렬하게 매달리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정말 알 것 같은 여성이 나오는 건 몇 편이나 있는가? (124p)     


미국 방송에서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다뤄지는가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어벤져스Avengers’의 ‘블랙위도우Black widow’ 캐릭터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하는 블랙위도우는 신체적인 능력과 더불어 육체적인 아름다움까지 과시하는 캐릭터이다. 극 중에서 몸매가 드러나는 쫄쫄이 의상을 입고 거친 액션 장면을 소화하는데, 다른 캐릭터의 격투신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섹스어필이 강조된 장면이 반복된다. 물론 시각적으로 육체미를 과시하는 경향은 ‘캡틴 아메리카’ 캐릭터에도 똑같이 적용되지만 섹스어필의 경우 블랙위도우에 집중되고 강화된다. 이처럼 블랙위도우의 경우 전사의 이미지에 성적인 이미지가 더해짐으로써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인 기대를 반영한 캐릭터로 변주된다. 즉, ‘섹시하고 매력적인 데다가 남자 못지않게 잘 싸우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욕구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를 충실히 반영하는 캐릭터가 블랙위도우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성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페르소나persona를 덧씌우는 현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블랙위도우에게 섹시함이 드러나는 쫄쫄이를 입게끔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극 중에서 주체적 여성이라 보기 힘들며주류 소비층(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고 만다.     


쫄쫄이만 입어야 하는 한 여전사의 슬픈 속사정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흥행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중컨텐츠가 관객에게 높은 소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기존의 젠더 아이덴티티를 붕괴하는 쪽보다는 지지하는 쪽을 선택할 때 더 인기를 끌고 안전하게 소비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저자가 우려하듯 ‘의미 있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주류 사회에 외면됨으로써 어떠한 변화도 낳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젠더관 속에서 남성 및 여성에게 기대되는, 또는 요구되는 이상적인 성 역할을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분법적인 젠더 아이덴티티에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우리의 기호를 통해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 책의 제목인 「나쁜 페미니스트Bad Feminist」에서 ‘나쁜Bad’이란 말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부족한’, ‘못 미치는’, ‘완벽하게 훌륭하지는 못한’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는데, 전통적인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는 비록 부족하고 모순이 많을지라도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을 믿기에 여전히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부분에 완벽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의 핵심인 성 평등을 믿는다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페미니즘은 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읽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도해 주는 원칙이 되어 주었다. 물론 이 원칙을 다 지키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도 하지만 내가 최고 버전의 페미니스트에 못 미쳐도 괜찮으니 상관없다. (16-17p)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자는 이전부터 성 평등을 믿고는 있었지만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에 뒤따라오는, 보이지 않는 행동규범들에 힘들어했고 또 이를 지키지 못해서 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때때로 아무런 생각 없이 여성에게 모욕적인 가사가 있는 노래와 영화를 즐기기도 하며 소비도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싫어하고, 브래지어도 싫어하고, 늘 여자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화장을 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늘 화가 나 있는 등의 암묵적인 행동규범들은 자신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성 평등을 믿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어느 순간 이 모든 규범들을 걷어 차버리면서 자신의 완벽하지 못함을 쿨하게 인정한다. 성 평등이라는 믿음만 가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사람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며 생각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페미니즘 사상/규범에 괴리감을 느끼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자유롭게 성 평등을 주창할 수 있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더불어 저자는 페미니즘의 엄숙한 규율에 지쳐있던 다른 여성들에게도 면죄부를 나눠주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죄책감을 녹아내리게 만든다.     


  면죄부가 주는 혜택은 남성이라고 해서 지나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특권을 가진 계층이긴 하지만, 이런 생득적 특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며 다독거린다. 더불어 남성들이 특권을 가졌다고 해서 당장 들고일어나 사회를 개혁시키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더 큰 사회적인 선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라는 정도의 아주 가벼운 주문만 할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 페미니스트들에게 ‘특권층’이라며,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았던 대다수의 남성들을 훌륭하게 포용하고 있으며, 나아가 페미니즘 담론의 스펙트럼을 넓힘으로써 남녀 모두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깊은 토양을 제공한다.     

 

당신의 특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장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그에 대해 미안해하고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당신이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 번도 겪지 않고 겪을 필요 없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284p)  


  ‘같음’을 고집하게 되면 ‘다름’을 다루는 것이 힘들며 ‘새로움’도 낳기 힘들다. 록산게이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한다면 페미니즘의 높았던 울타리를 허물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울타리 밖에서 원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한 것이 아닐까. ‘다름’을 포용함과 동시에 성 평등 논의를 새로운 지평으로 열어젖힌 것이 그녀가 페미니즘에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나쁜 페미니스트에도 정말 나쁜점은 있다     


1) 페미니스트에 대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사실 이 책은 페미니즘/페미니스트에 대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많이 부족하다. 록산게이의 업적은 인정하나, 책 내용을 뜯어보자면 TED 강연에서 했던 말을 활자로 길게 늘여놓았을 뿐 강연에서 저자가 논의했던 주제들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진 않는다. 더구나 인종차별, 동성애 차별에 대해서도 지면을 대폭 할애하는데, 성차별과 인종차별, 동성애 차별은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엄연히 다른 논제이다. 저자는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그러한 차별을 논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차이와 차별에 대한 책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고... ‘페미니스트가 바라보는 차이와 차별’ 혹은 ‘우리 모두의 인권’ 정도의 주제가 그나마 적당하겠으나, 이런 의도였다면 제목 자체를 바꿨어야만 했다. 결국 더 많은 책을 팔기 위해 소제목으로 써야 될 것을 제목으로 선정했으며, TED 강연만 봐도 그녀가 주장하는 바를 알 수 있기에 굳이 책을 사보지 않아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저자는 많은 사례를 미국 현지 대중매체 컨텐츠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컨텐츠를 자주 접하는 미국인이라면 모를까, 저자가 사례로 든 영화, 드라마, 책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느끼기에는 ‘왜 이런 사례를 들었지?’하는 의문만 생겼다. 비록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긴 하지만 충분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결과적으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들었던 수많은 사례들이 오히려 효과적인 ‘맥커터’로 기능하고 있어 ‘이 책은 글로벌 독자를 대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중소 방송국의 컨텐츠까지 끌여다 쓴 레퍼런스 사용법에 미국인들조차도 비난하는 리뷰가 아마존에 있는 걸 보면, 내용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어느 하나 손을 들어주기가 힘든 책이다.         


 

총평 페미니즘이 주는 무게감을 내려놓고 싶다면,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 및 평등을 옹호한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스트의 실천이 없었다면 오늘날 여성의 지위와 사회적 변화는 요원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적 문명의 수립 이후, 여성의 열등한 지위 개선을 위해 싸워온 전사들의 창과 방패가 페미니즘이었으며,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창과 방패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이 탄생할 시기와는 너무 많이 달라졌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서명한 법안이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Lilly Ledbetter fair pay act이었으며, 양성평등은 이미 사회적으로 상식이 되었고,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로 포커싱이 옮겨가고 있다. 나아가 ‘일베’, ‘#womenagainstfeminism’ 같은 안티페미니즘 현상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어 창과 방패로의 페미니즘에 대한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오늘날 전통적 페미니즘이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는 주장도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는 언제까지 페미니즘을 창과 방패로 사용할 수 있을까.      


  어쩌면 레지스탕스 선배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타인을 구별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레지스탕스 선배가 나에게 그었던, 보이지 않고 넘지 말아야 하며 감히 넘보지도 말아야 할 마지노선을 페미니즘이 긋진 않았을까.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질 수 있었던 확신은, 이제는 타인과 구분짓는 것을 멈추고, 창과 방패를 그만 내려놓을 시기라는 것이다.     


미국 여성들의 #womenagainstfeminism 운동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레지스탕스 선배처럼 행동하는 것만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길일까?’ 책에서 찾을 수 있었던 대답은,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방법은 선배가 했던 방법 외에도 무수히 많은 방법들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선배의 말처럼 내가 여성으로서 겪는 모든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겠지. 성희롱, 성폭력 피해의 고통이나 강간의 공포를 이해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일 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찾아오는 고통을 내가 십분의 일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우연히도 선배를 만난다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배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지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나 나나 인간이 평등한 존재임을 믿고 있으며, ‘성 평등’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록산게이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쥐어준 것처럼, 나 또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되, ‘평등’이라는 공통된 믿음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대화의 말미에는 젠체하며 볼테르Voltaire 스타일로 마무리를 지었을 것 같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선배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박해와 차별을 당한다면,

  나는 선배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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