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2016년 6월, 나를 찜찜하게 만들었던 두 가지 대상이 있다면 단연 '곡성(哭聲)'과 '채식주의자'일 것이다. 하나는 영화로, 하나는 책으로 아주 나를 괴롭혔는데, 영화나 책을 끝까지 다 보아도 당최 이게 무슨 말인지 감독이나 작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1도 모르겠다며 두 손 두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채식주의자'는 맨부커상 수상 때문인지 출판업계에서 아주 왁자지껄하게 홍보를 했는데, 정작 '떠들썩한 홍보만큼 독자들이 이 책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몸에 좋다니까 성분도 모르고 입에 넣고 보는 것처럼, '외국에서 인정받고 상도 받았다니까 한 권 사보세요'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중 곡성은 이동진의 라이브톡을 통해 대부분의 물음표를 말끔하게 지울 수 있었는데, 그때의 쾌감이란.. 이래서 갓동진 갓동진 하는구나..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채식주의자'이다. 책 뒷부분에 해설이라고 따로 있지만, 읽다 보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는 당혹감이 든다. 해설에 각주를 달아야 할 정도로 이해하기가 힘들고 매끄럽지 않으며 또 다른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책에서는 답을 찾기가 힘들 것 같아 인터넷으로 눈을 돌렸으나 이쪽도 상황이 그렇게 좋진 않다. 10명 중에 8~9명의 서평이 죄다 '폭력'이란 키워드에 포커싱 되어 있었다. 몇십 개의 서평을 넘겨봐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률적인 서평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궁금해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저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폭력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세계를 견뎌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 책의 화두라고 말했단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저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충실히 책을 읽었고, 그 결과 비슷한 후기들이 쏟아진 게 아닐까.
사실 이 책은 주제의식을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이해하기 참 힘든 책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던,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이 꼽았던 '폭력' 혹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란 키워드로 모든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선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기존에 논의가 많이 된 '폭력'이란 키워드보다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욕망'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썰을 풀어보려고 한다.
처음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주인공이 진짜 영혜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연작소설인 이 소설은 분명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하지만 영혜를 쫓아가다 보니 끝에 남는 질문은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데?'하는 허무함이다. 처음 곡성을 본 후 영화관을 나왔을 때 찝찝함이 이 책에도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여느 후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폭력'이 주제의식인가 하는 생각도 했으나 뭔가 부족했다. 영혜가 주인공일까? 만약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혜가 아니라 다른 인물들이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ㅡ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빨리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주인공은 영혜가 아니라 영혜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보는 세 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 남편 : 1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지켜보는 인물인 남편은 영혜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항상 자신의 이해 범위, 인식 범위 안에 영혜가 존재해야 하며, 그 테두리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권력관계, 위계는 영혜가 채식주의자임을 선언하면서 뒤집히게 된다. 남편이 설정한 테두리에서 벗어나려는 영혜의 욕망에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잔소리를 좀 더 늘어놓거나 처갓집에 고자질하는 정도이다. 종국에는 영혜를 컨트롤하려는 본인의 욕망과 영혜의 욕망의 충돌하자 남편은 영혜를 떠나버린다.
2. 형부 : 2부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에게 예술가적 충동과 성충동을 동시에 느끼는 형부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가족모임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은 영혜의 채식주의가(엄밀히 말하자면 존재 전환의 욕망이) 형부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감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왜 유일하게 형부만 공감을 할 수 있었나. 그 이유는 형부 그 자신이 영혜와 동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2년 넘게 밤을 꼬박 새워도 새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가정과 직장 모두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돌파구이자 예술적 영감의 매개가 영혜였다면? 형부의 존재 전환 욕망이 분출되는 시발점이 영혜의 몽고반점이었다면?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형부가 영혜에게 조금씩 다가갈수록, 온몸에 꽃을 수놓을수록 영혜는 그만큼 더 힐링(성충동_리비도)되는 장면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예술적 영감을 빌린 형부의 욕망과 영혜의 욕망이 새로운 합치점을 발견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한 끗 차이라고 했던가. 아슬아슬하게 곡예 줄타기를 하던 예술은 결국 포르노가 되어버린다.
3. 인혜 : 3부 '나무불꽃'은 영혜를 곁에서 돌보면서 지켜보는 언니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난 사실 책을 두 번째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인혜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피해자이며 영혜와 같이 서글픈(?)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두고 여러 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중 인혜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인혜는 영혜를 돌보는 보호자이긴 하나, 영혜를 정신병원에 가둔 것은 인혜이며 음식을 먹기 싫다며 영혜가 소리 지르는 걸 외면하는 것도 인혜이다. 영원히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영혜가 병원에서 죽은 것도 결국 인혜의 공(?)이 크다. 이렇게 나열하니까 꽤 인간 파탄자 같은데.. 사실 3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혜와 인혜의 욕망의 충돌, 그리고 그 결과를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발버둥 치는 영혜를 두 명의 보호사와 간호조무사가 달려들어 침대에 눕힌다. 두 팔과 두 다리를 묶는다.
나가 있으세요.
가족은 보기 어려워요. 나가 있으세요.
순간 영혜의 눈이 그녀를 향해 빛난다. 고함이 격렬해진다. 분절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묶인 사지를 버둥거리며, 영혜는 마치 강박을 끊고 그녀에게 달려들려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영혜에게 다가간다. 뼈만 남은 영혜의 가느다란 팔이 꿈틀거린다. 입에 흰 거품이 물린다.
싫........어........!
처음으로, 분명한 발음으로 영혜가 고함을 지른다. 흡사 짐승 같은 소리다.
인혜는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추측건데 아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었을까. 3부에서 인혜는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남편의 성적 충족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인내하며 외도로 떠난 후에도 욕조에 웅크려 남편의 빈자리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성실하게, 어렵게 지켜온 가정을 부숴버린 사람이 자신의 또 다른 가족인 동생이라면? 아마 증오하는 마음과 끌어안고자 하는 양가적 감정이 계속 충돌하진 않았을까? 인혜의 이러한 내적 감정의 충돌이 3부의 주된 흐름인 것 같다. 의사의 진단처럼 영혜는 아마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를 포함하여 누구 하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소통하려고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약과 음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혜는 영혜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으며 영혜와 인혜의 욕망 충돌은 인혜의 단죄로 끝이 나게 된다.
내 맘대로 키워드를 '욕망'으로 뽑아서 인물 분석을 해봤는데, 사실 이렇게 써놓고도 제대로 봤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곡성에 나온 대사 그대로 '뭣이 중헌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의 주제의식은 이런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서 새로운 욕망이 발현되었을 때,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게 되는가. 욕망과 욕망의 충돌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수렴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 어렵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