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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Nov 27. 2016

붕붕드링크와 187개의 자소서

『피로사회』 한병철

붕붕드링크와 187개의 자소서


  2012년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던 시절, 동기들 사이에서 '붕붕드링크'라는 음료가 유행했었다. 붕붕드링크는 박카스에 레모나, 원비D, 포카리스웨트 등을 섞어서 만드는 일종의 에너지드링크였다. '내일의 체력을 끌어와 오늘에 쓴다!!'라는 모토로 만들어진 이 음료는 인터넷에 여러 가지 제조법이 공유되고 있었고 효과도 좋았던 터라 취준생뿐만 아니라 중간, 기말고사를 앞둔 친구들에게도 굉장한 인기였다. 나 역시도 서류 제출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매번 붕붕드링크의 힘을 빌리곤 했다. 시큼하고 달달한 드링크 한 잔이면 밤새 창작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기에 항상 마감에 쫓기는 취준생에겐 이만한 아군도 없었다. 하지만 각성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특히 자주 애용하던 '붕붕드링크 그레이트 스웨트'의 경우, 각성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각성 시간에 비례하여 후폭풍 또한 엄청났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심적 압박과 동시에 코마Coma상태에 빠지는데, 죽도록 피곤하지만 잠이 들지 않아 고생한 적도 있었고 빈사상태로 하루 종일 드러누웠던 적도 있었다. 붕붕드링크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동시에 몸을 피폐하게 만드는 금단의 도핑Doping약물이었다.


붕붕드링크 그레이트 스웨트(AKA. 붕그스) 제조법


  하지만 취업난에 대해 연일 보도하는 TV를 보면 붕붕드링크의 후폭풍보다 더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인문계 졸업생 90%가 백수라는 '인구론' 과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인 '문송합니다'라는 신조어 앞에서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나둘씩 서류가 붙는 동기들과 '귀하의 역량은 우수하나..'로 시작되는 광탈문자는 나를 더욱더 채찍질하고 몰아붙이게 만들었다. 공채가 뜨는 모든 기업에 서류를 넣는 것이 목표였기에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대기업 서류 제출 마감이 겹치는 'A매치데이'에는 신체의 힘과 정신을 마지막 한 줌까지 끌어올려 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를 넘어서지 않으면, 당장 오늘을 불태우지 않으면 내일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류 제출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붕붕드링크에 의존하는 날이 많아졌고, 아무 거부감 없이, 혹은 애써 거부감을 무시하면서 도핑 상용자Doper가 되어버렸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박카스와 레모나가 섞이게 되면 극소량이지만 발암물질인 벤젠이 생성된다고 한다;;). 그렇게 눈앞의 성과를 위해 마시고 달리며 스스로를 영양분 삼아 불태웠지만, 불행히도 행운의 여신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미소를 지었다. 결과적으로 2012년 하반기 취업에 실패했고 그 후로 2번의 시즌을 더 거치고 나서야 취업이 되었다. 취업이 확정된 2013년 하반기까지, 나는 붕붕드링크와 함께 187개의 자소서를 제출했다. 


취업난이 낳은 신조어들


  취업난이 심각한 요즈음. 동시대를 지내는 모든 구직자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취업이란 이처럼 치열하면서도 강렬했던 '자기착취'의 경험이었다. 도핑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마셨던 붕붕드링크의 후폭풍과 더불어 2013년 상반기, 넣었던 원서가 모두 떨어지고 나서는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을 겪었다. 다가오는 하반기 공채를 위해서 한 글자라도 더 써야 하지만 도저히 의욕이 나지 않았다. '안되면 될 때까지 부딪혀보리라'라는 내 믿음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다. 이 책은 21세기의 질병인 우울증, 과잉행동장애, 그리고 내가 겪었던 소진증후군 같은 질병이 왜 생겼는지,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 본인의 철학을 통해 고찰한 철학 에세이이다. '번역투 서술'+'철학 개념어 사용' 2 combo로 읽기 쉬운 책은 절대 아니지만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책 전체를 꿰뚫는 첫 문장이 너무나도 좋은, 두께는 얇지만 울림이 크고 깊은 책이다. 책에서 감명 깊게 읽고 생각해본 점을 꼽자면 아래와 같다.



자기착취의 시대피로사회


  이 책의 주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근대의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강제규율의무타자에 대한 거부 등)이 후기 근대부터는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성과자기주도과잉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가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인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성과주체로 전환되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각 사회의 특징들과 차이점을 비교해나가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성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4p)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는 '할 수 있음'이라는 무한궤도를 질주하는 기차와도 같다. 무한궤도를 돌면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소진시킨다. 일종의 무한정한 '자기착취'인 것이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자발적인 착취이기에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며,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하지만 무한정한 것처럼 느껴지는 '할 수 있음'은 절대 무한정하지 않으며 어느 순간에 가서는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음'이라는 무한궤도에서 이탈해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자각할 때, 무한정할 것 같았던 자기착취 사이클이 끊어지면서 우울증,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신경성 질환은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노오오오력'이 부족한 것일까


  일방적인 명령과 충고를 소통으로 알고 있는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네들이 취업이 안되는 이유는 '노력'만 했지,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물론 더 큰 노력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어른들을 비꼬는 말이겠지만,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이나 실패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보면 취업의 당락이 한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하는듯하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우리가 겪었던 취업난이 ‘노오오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우리의 노력 부족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고민해야 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성과사회의 무서운 점은 모든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오픈되어 있고 자율적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을 채우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자 의무로 돌아간다. 무한정해 보이는 자유가 사실은 무한정한 책임이 되어 짓누르는 것이다. 취준생이었던 내가 스스로를 몰아붙인 이유도 자유롭게 대학생활을 보낸 ‘원죄’에 대한 때늦은 ‘속죄의식’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취업이 길어지며 쌓여가는 광탈 문자는 나 자신을 탓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목을 죄어오는 밧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내 목젖을 건드릴 즈음에야 겨우 알아챘기에 상처만 더 깊게 남게 되었다. 취직이 잘 풀리지 않던 동기들도 점점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서로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는듯했고, 그에 맞는 벌을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생활이라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시간을 ‘취직을 위해’, ‘경쟁을 위해’ 충실하게 보내지 못 했던 나와 몇몇 동기들은 속죄의 철퇴를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성과사회는 개인의 자율을 적극적으로 존중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공적 영역은 축소된다. 허술한 사회안전망은 취업전선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가 없다. 개별 주체에게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다양한 문제를 개인화시키고, 그러한 갈등이 나오는 맥락은 비가시화 되어간다. 즉 우리가 들었던, 어른들이 말하는 '노오오오력이 부족해!'란 말은 경기불황시대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며 끊임없이 긍정을 주입하고자 하는 성과사회의 암울한 유행어인 것이다.


아, 제가 그래서 취직을 못했나 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에게 원죄를 묻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에 청진기를 먼저 들이대야 한다.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는 개인책임론은 ‘우리 사회는 완벽한데 니가 못 해서 그런거야’라는 전제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시스템은 그렇게 완벽하진 않다. 오히려 저자가 지적하듯 시스템은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 개인의 사정을 봐주진 않는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회문제를 일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린다면 의미 없는 소진만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모두가 노력을 경주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왜 우리는 경쟁으로 고통받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의문은 이 책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도 궤를 같이 한다. ‘성과만을 위한 경쟁 사회가 과연 옮은 것인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절망적인 비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는 사회에서 발생 가능하다. (28p)    


  이 시대의 취준생들은 그 각자의 인생에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열린채용’이라는 명목 하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더 많은 소진적, 고갈적 노력을 부추기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에서 경쟁 시스템 자체를 거스를 순 없다. 그렇다고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도 옳지 않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서로 간의 유대감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정도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피로사회 대안으로 제시하는 ‘오순절의 기도’처럼 말이다. 하지만 비록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할지라도 딛고 일어설 작은 디딤돌, 작은 말 한마디가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취준생에게는 ‘노오오오력!’이라는 훈수보다는 힘내라는 가벼운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게 어떨까. 한때 도서관 노트북열람실에서 피곤한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던, 붕붕드링크를 나눠마시던, 지금은 연락이 끊긴 선·후배, 동기, 그리고 그 당시의 나도, 다들 저마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 누군가의 따뜻한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동작그만 밑장빼기냐?

  

  이 책의 주옥같은 문장과 철학적인 논점이 많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슬쩍(?) 논점을 회피한 부분들이 눈에 밟힌다. 몇 가지만 좀 더 보충 설명했더라면 훨씬 괜찮은 에세이가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에 적어본다.


1) 나와 이건희 회장이 같을까

  저자는 성과사회에서는 착취자가 피착취자이며 시스템에 의한 지배는 겉으로 자취를 감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스템적인 지배가 보이지 않는 지배라고 할지라도 지배와 차별, 그리고 착취하는 방식 자체는 평등에 반하는 생산이거나 분배 방식임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저자의 ‘피로사회’담론은 이러한 불평등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과사회에서는 가해자가 곧 피해자이니, 이건희 회장도, 나도 똑같은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건희 회장이 나와 똑같은 처지일까? 나아가 사회 위계 상의 여러 집단들가령 대기업 오너와 그들의 하청을 받는 중소기업 관계자들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등 여러 종속관계에 얽힌 이들이 수행하는 자기착취의 동기방식결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저자의 ‘피로사회’ 담론이 진정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꿰뚫고자 하는 책이라면 자기착취의 분석은 최소한 계층별로는 세분화시킬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2) 성과주의 시스템에는 only 지배자(착취자)가 없는가

  한국 사회는 피로하다. 취업시장에 관계된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소서를 쓰느라 밤을 새는 취준생 뿐만 아니라 몇 만장이나 되는 자소서를 검토하는 인사담당자도, 최종 검토를 하는 인사팀장도, 이를 승인하는 사장도 모두가 피로하다. 이는 어느 누구도 성과주의 시스템에서 수혜자가 없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는 진정 지배자가 없을까. 의사결정 체계의 상층부에 속하는 특정 개인이(예를 들어 인사팀장이라던지, 사장이라던지) 하층을 구성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혹은 어쩌면 그들보다 더욱 자기착취를 하기 때문에 시스템에는 지배자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의 의사결정이 성과주의에 기초한 경쟁 시스템을 강화함으로써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미미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은 착취로 내몬다면 그는 객관적으로 지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각자의 수행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는 시스템에서 지배집단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스템은 그래서 시스템이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들을 세심하게 포착하지 않고 뭉뚱그려 ‘착취자=피착취자’ 개념으로 서술했는데, 이는 시스템의 속성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시작은 창대하나그 끝은 미약하리라

  성과사회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꽤나 신선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긍정성 과다에 따른 피로, 소진, 질식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긍정성 과다에 따른 부작용은 일찍이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의 「긍정의 배신」에서 접했기에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한 방법들이 신통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한트케의 말을 인용해 보다 적극적인 피로를 권장하고 있는데, 이를 곱씹어 보면 결국 성과사회라는 체제 안에서 막간의 여유를 사용해 긴장을 풀자는 말이다.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고 우애의 시간을 다짐으로써 공동체 부활을 주장하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한계점을 드러낸다. 저자는 긍정의 피로를 역설하고 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성과사회 시스템 자체는 부정하지 않되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스스로에게 주입하자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 책을 관통하는 논리는 개인의 신경증을 사회문제로 환원했다가 다시 해결책을 개인에게서 찾음으로써 다분히 체제 순응적이다. 나아가 사회문제에 대한 담론을 또다시 개인의 문제로 소진시키는 모습으로까지 비친다. 내가 만약 취준생일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취업대란 속에서 ‘자소서를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쓸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담론을 뒤로한 채 ‘자소서 쓰기를 한번씩 중단하고 다 같이 노가리나 까며 우애의 시간을 가집시다’하는 비아냥거릴법한 대안이라 느껴져 결말이 굉장히 씁쓸하게 다가왔다.



총평 당신이 왜 피로한지 철학적으로 알고 싶다면,


  전체적인 개념의 얼개나 짜임, 그리고 결말 부분에 아쉬움 점이 다소 있긴 하지만 저자의 내공이 느껴지는 문장에 감탄을 하며 읽었던 경험이 새로웠다. ‘아, 철학 에세이도 이렇게 문학적일수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랄까나. 나아가 이 책은 내가 끊임없이 붕붕드링크를 마시며 자소서를 써내게 만들었던 기제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분석의 틀을 제공해주었으며,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당신이 왜 피로한지, ‘바쁘다, 바쁘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왜 계속 가속페달을 밝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책을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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