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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Dec 04. 2016

사이코패스의 자기변론기

『종의기원』 정유정 (feat. 추격자)

  몇 년 전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를 극장에서 봤는데,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가슴 졸이는 시나리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윤석과 거대한 악마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 보이는 서영희의 열연. 그리고 처녀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완성도까지.. 한국 스릴러 영화 중에 이런 작품이 또 있었나 할 정도로 굉장한 작품이었다. 그 당시 '추격자'의 모든 부분들이 충격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본 것은 하정우가 열연한 '지영민'이었다. 이 '지영민'이라는 캐릭터는 시쳇말로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사람을 죽이는 희대의 살인마이다(그것도 망치와 정으로;;). 하지만 이 캐릭터, 여느 스릴러나 범죄 영화에서 보는 악당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뚜렷한 동기도 없으며 계획적이지도 않았고 어딘가 모지란 부분도 있어 영화 초반부터 경찰에게 잡히고 만다. 그러곤 순진하게 '내가 범인입니다~' 하며 자신의 범행 수법을 태연하게 알려주기(?)까지 한다.


자신의 범행 수법이 대견한 듯 심문 도중 흐뭇한 웃음을 짓는 지영민


  하지만 이 영화의 무서운 점은 여기에 있다. 초반부터 관객에게 패를 보여주면서도 플롯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관객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더욱이 나를 더 혼란에 빠뜨리게 했던 것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그래서 지영민은 사람들을 왜 그렇게 죽였데?'라는 질문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극 중에서 '억눌려진 성충동이 살인을 통해 발현되지 않았을까'라고 간접적으로 리비도 이론을 제시하지만, 조카를 해하려 했다는 사실과 분석관에게 '진짜 이유를 알려줄까?'라는 장면 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영화가 막을 내릴 쯤 지영민은 잡혔지만 마음 한구석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 지식과 상식으로는 지영민의 행동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살인의 동기를 뚜렷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불편하게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인터넷을 뒤진 후에야 지영민이 단순한 연쇄 살인마가 아닌 '사이코패스'이며, 몇 해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영철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회자되던 '사이코패스'의 논점은 아무런 동기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으로 묶고, 그 개념에 포함되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어떤 사람들'로 꾸역꾸역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 받아들일수록 사이코패스는 더욱더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늘 소개할 '종의 기원' 또한 사이코패스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한유진은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다. 어릴 적에는 몇몇 특이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다가 특정 사건에 의해 살인으로 번지게 되어 사이코패스로 변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처음 읽을 때는 정유정 작가 특유의 너무나도 살아있는, 그리고 생생한 표현 때문에 읽으면서 눈살이 찌푸려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잘 참아내고(?) 두 번째 읽을 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며 읽으니 그제야 좀 뭔가를 알 것 같았다. 포인트를 잡아서 간단히 썰을 풀어보자.



작가는 왜 1인칭으로 썼을까?     


  보통 스릴러나 추리소설을 보면 대부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많이 쓰게 된다. 범죄나 사건 현장을 목도하면서 주인공이 느끼게 되는 두려움,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고 독자들도 쉽게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의 기원'은 철저하게 사이코패스인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장르의 성격으로는 3인칭이 더 효과적일 텐데 왜 하필 1인칭으로 썼을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오감의 범위를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위협과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 불행, 비극 앞에서 철저히 무력한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존재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극복할 수 있도록 부단히도 '의미'를 부여한다. 천당과 지옥, 윤회사상 등의 개념을 만들어 죽음을 극복했고, 한없이 연속적일 것 같은 시간의 흐름을 12등분 하여 인간의 이해 범주에 영원의 연속성을 포함시켰다. 최근에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으며 이는 인간 존재의 확장과도 같다.


  다시 사이코패스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사이코패스란 추격자의 지영민처럼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며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다. 정유정 작가는 이 지점에서 물음표를 떠올린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사이코패스를 이해하게 된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보이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하여 3인칭보다는 1인칭 서술이 사이코패스를 이해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저자는 사이코패스로 변해가는 과정을 주인공의 관점으로 서술함으로써 '아 사이코패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구나'하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작품은 사이코패스의 자기 변론을 들어보는 것, 나아가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문학적 실험으로 다가온다.



제목이 왜 '종의 기원'일까     


  사이코패스를 이해하고자 함이 이 소설의 목적이라면 다른 제목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제목이 '종의 기원'일까. 여러모로 생각해보건대 필연적으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아마 저자도 그것을 생각한듯하고;). 다윈은 그의 저서에서 진화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하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이 변종에 대한 가설이다. 변종은 처음에는 국지적으로 나타난다. 개체 무리에 섞여 살면서도 어느 정도 변화하여 개량되기 전까지는 무리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전파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단층을 분석할 때 지층마다 전혀 다른 종이 발견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원류는 같다고 한다. 바꿔 말하자면 사이코패스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우리 주위에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범죄 등의 사회문제로 번져 집중 조명을 해보니 완전히 다른 종처럼 인식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나아가 진화론의 다른 측면에서도 좀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목이 긴 기린만 남아있는 것은 높은 나무의 과일을 먹기에 목이 긴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은 잘 알려져 있다. 목이 긴 유전자가 원래부터 기린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해 목이 긴 개체가 선택받았다는 자연선택설이다. 사이코패스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긴 결과물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은 엄마에 의해, 이모에 의해 끊임없이 구속당하고 속박당하는 인물로 다뤄지는데, 이는 한유진이 사이코패스가 된 것은 엄마나 이모로 대변되는 주변 인물이나 사회의 책임이 일정부분 있다는 저자의 의도를 드러낸다.


  제목을 통해 추측해본 저자의 의도는 사이코패스란 이미 예전부터 우리 주변에 존재해왔으며,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선택된 결과물이 사이코패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총평'Nice try. But...'


  이 작품의 문학적인 의미를 찾는다면 사이코패스를 1인칭으로 서술한 것. 나아가 그러한 문학적 실험으로 지영민 같은 전혀 이해 불가능한 사이코패스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점일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정 반대 측면에서 이 작품의 단점이 존재한다. 1인칭으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이런저런 부연 설명이 너무 많이 들어간 느낌이다. 애초에 이해 불가능한 대상을 이해 가능한 범위 안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밸런스가 어긋나 버려 어느 순간부터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설명충처럼 느껴졌다. 거기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등장하는 엄마의 일기.. 일기가 없었다면 스토리 진행을 어떻게 풀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야기 진행의 상당 부분을 일기에 의존한다. 구성이 그렇게 탄탄하진 않다는 반증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뭐, 저자의 문학적 실험에 의미가 있기에 총평은 Nice try. But... 정도가 되지 않을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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