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령화 가족』 천명관
명절이 다가오면 수험생부터 시작해 취준생, 결혼적령기 남녀, 신혼부부 등 모두가 마음을 졸이기 시작합니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빨간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긴장하는 까닭은 가깝고도 먼 당신, 가족들 때문입니다. “어느 대학 갈거니”, “취직 준비는 잘 돼가니”, “결혼 언제 할래”, “애는 언제 가질래”, “애 둘은 가져야 하는데” 등등..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유발되는 질문들이 한 다발로 던져지는 기간이 바로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입니다. 이따금씩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이게 가족인가’하는 회의감까지 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느 언론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추석 금지어로 1위가 ‘취업했니’, 2위가 ‘얼마 받니?’, 3위가 ‘결혼 해야지?’ 인 것을 보니, 명절날 가족들의 덕담아닌 덕담으로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것은 우리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인 듯합니다.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거리낌 없이 훈수를 두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행위를 인내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우리가 나고 자라면서 맺어지는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품으로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소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6년간 키운 아들이 친자식이 아니라면? 태어날 때부터 다른 집 아이와 바뀐 것이라면? 얼핏 들으면 막장 삼류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뻔한’신파가 예상되는 줄거리지만 이런 ‘뻔한’ 스토리를 잔잔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여섯 살까지 내 아이로 철썩 같이 믿고 키웠던, 그러나 마주친 현실 앞에서 갈등하는 아버지인 ‘료타’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 영화입니다.
대기업에 잘나가는 직장인인 료타와 상냥하고 배려심이 많은 미도리 사이에서 낳은 케이타는 료타 부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케이타를 낳았던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오게 되고 미도리가 출산할 시 다른 부부의 아이와 바뀌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료타 부부는 고민 끝에 자신의 친아들(류세이)을 키우고 있던 유다이 부부와 합의하여 서로의 아이를 바꿔 키우게 됩니다.
감독은 류세이를 대하는 료타, 케이타를 대하는 유다이를 비교하면서 아이에게 필요한 아버지의 모습, 나아가 가족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묻습니다. 철물점을 운영하는 유다이는 비록 넉넉하진 않지만 세 자녀를 둔 아버지입니다. 그는 인간적이며 너그럽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려고 노력합니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기도 하지만 짬을 내어 아이들과 함께 연을 날리기도 하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방에 몸을 던져 같이 어울리기도 합니다. 유다이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좁디좁은 욕조에서 다 같이 목욕을 하는 시간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입니다.
반면에 료타는 다정하긴 하지만 동시에 냉정한 사람입니다. 놀이방에서 어우러져 뒹구는 유다이와는 달리, 료타는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을 손사래 칠 정도로 싫어합니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던 탓에 자신의 아들도 승부욕이 강해야 하며 모든지 잘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료타는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류세이를 보고 젓가락질을 가르쳐주기도 하는데, 유다이와 함께 살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목욕을 했던 류세이가 료타의 집에서는 욕조에 혼자 앉아 젓가락질을 연습하는 모습이 슬프게만 느껴집니다. 결국 케이타는 유다이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류세이는 료타에게 마음을 닫게 되죠.
유다이의 집에 있는 케이타(좌)와 료타의 집에 있는 류세이(우)
이 영화에서 감독은 ‘기른 정’이라는 모티브로 혈연 가족의 신화를 깨뜨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가족애가 싹틀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같이 밥을 먹고, 좁은 목욕탕에서 살을 부대끼고, 현재의 일상성을 나누는 관계. 인간적인 유대감과 그 유대감을 나누는 시간 그 자체가 가족임을 말하는 것이죠. 각기 다른 가정에서 지내는 케이타와 류세이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감독이 묵직하게 던지는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서로의 시간에 물들어가는 것이 가족이 아닐까.
영화의 종반부 료타가 아들인 케이타의 부재를 깨닫는 장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합니다. 소파 구석에서 겨우 찾은 구겨진 카네이션. 그리고 우연찮게 카메라를 돌리다 발견한, 케이타가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 케이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고 자신 또한 케이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장면은 한국영화의 흔한 신파처럼 잔잔하고 극적인 배경음악을 동반하며 ‘자, 이제부터 눈물을 터트리세요!’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경음악 없는 고요한 정적 가운데 힘들게 삼키는 료타의 흐느낌이 더 깊고 묵직한 여운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들이 공유하는 ‘시간’에 대해 말했다면,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에서는 가족 간의 ‘의리’를 말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의 화자인 오감독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배신’의 아이콘으로 등장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했지만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더라도 이보다 더 못할 수는 없다.(16p)’ 라는 혹평이 따라붙을 정도로 흥행에 참패합니다. 재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순진한 관객들을 배신했고, 제작자와 투자자를 배신했으며, 충무로의 공인된 배신자였던 오감독은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됩니다.나아가 주변 사람 모두에게 돈을 꾸었으나 아무에게도 갚지 못했고, 술자리에서는 행패를 부리기 일쑤라 어느 누구도 그를 찾지 않게되죠. 오감독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다른 모두에게 ‘배신자’였습니다. 단,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오감독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오감독의 형, 오함마입니다. 쉰두 살에 백이십 킬로그램, 폭력, 강간, 사기, 절도 전과범인 오함마는 동생인 오감독과 함께 엄마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오함마는 오감독의 입장에서는 인간쓰레기도 이런 인간쓰레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오함마는 전과범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불륜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수십 년을 모른 척 지내고 있었으며, 막내인 미연이 하소연할 때에도 미연을 가장 먼저 껴안는 사람이 오함마였습니다. 오감독과는 다르게 부모의 피를 반밖에 물려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왜 이렇게 가족을 보호하려 드는 것일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가족 보호의 행동기제는 ‘혈연’을 넘어선 ‘의리’ 때문이었습니다.
오함마는 자리에 누운 채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 그러다 민경이가 가출하고 난 다음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어.
- 그게 먼데?
- 그앤 나하고의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지.
의리? 삼촌들 놔두고 피자 한 판을 혼자 다 처먹는 년이?
- 그래서 나는 민경을 내손으로 직접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어. 그 애가 의리를 지켰으니까 나도 의리를 지켜야지. (180p)
한편 엄마가 말하는 인간적인 정리(情理)는 어떤 의미인가요. 엄마에게 정리란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가정을 꾸렸던, 죽은 남편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자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들마저도 평생 보살피려는 헌신과 같습니다. 피가 완벽하게 섞이진 않았지만 여느 혈연가족과 다를 바 없이 엄마의 역할을 묵묵히, 오랜 세월 해내는 엄마의 행동은 정리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엄마의 정리는 오함마가 감옥에 들어갈 각오를 하면서까지 민경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던 ‘의리’의 또 다른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엄마와 오함마에게 있어서 의리와 정리란 이것저것 재고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한 후 실행하는 비교우위의 최선이 아니라 제 몫이 없더라도 가족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려는 맹목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오감독은 평소 자신이 비웃었던 낭만적인 단어―의리/정리―를 행동에 옮기는 오함마와 엄마를 보면서 조금씩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하게 됩니다. 불법도박장 사장인 약쟁이에게 붙잡혀 사경을 헤맬 정도로 두들겨 맞아도 결코 오함마의 거취를 말하지 않는데, 이제껏 주위사람들에게 이기적으로 대하며 한 번도 ‘의리’를 지키지 않았던 오감독이 목숨을 건 상황에 이르러 의리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게 되고 스스로를 구원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나아가 캐서린과 성적인 관계만 맺었던 과거의 태도에서 나아가 그 이상의 인간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상대의 이질적인 성격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며 함께 살아가는 성장의 순간, 오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캐서린과 나는 아직 잘 지내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습관과 취향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불안정한 상태를 지나 조심스럽게 신뢰를 쌓으며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인간적인 정리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열정적인 사랑보다 더 차원 높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85p)
어쩌면 엄마의 집에 들어온 이후 오감독이 깨달은 것은 과거 엄마의 불륜행위와 형제들의 출생 비밀이라기보다 이제껏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보고 싶은 점만 보려 했으며, 그들의 진짜 삶에 한 번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감독은 사랑 따위는 믿지 않으려는 냉소주의자지만 그런 현실의 부조리함을 핑계로 어떤 주체적 결단도 미루는 미성숙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를 배신자로 여기지 않았던 가족들의 ‘의리’를 느끼며, 그 자신도 가족의 구성원으로 스며들어갑니다.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피를 나눈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천명관 작가는 ‘의리’라고 대답하는 듯하고, 히로카즈 감독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대답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각각 소설과 영화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로 멋지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소설은 가벼운 잽으로, 영화는 묵직한 스트레이트로.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두 작품 모두 ‘혈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피를 나눴다’라는 사실은 그저 생물학적 사실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가족’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더불어 책을 다 읽고서 『고령화 가족』이라는 제목을 곱씹어 봅니다. 가족 구성원의 평균나이가 고령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살을 부비고 살아도 ‘고령이 되어서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사람들’ 이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같은 집, 같은 식탁에서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