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나홍진, 『페스트』 알베르 까뮈
취업 시즌이 끝날 무렵, 저는 상당히 들떠 있었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어여삐 여기었는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서류통과율이 높았으며 인적성도 떨어진 적이 없어 비교적 면접을 많이 볼 수 있었죠. 11월 중순을 넘어서는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최종면접을 6곳이나 보았는데, 최종결과 발표 전부터 연일 축하 파티를 벌리곤 했습니다. 역대 최악이라는 구직난 속에서 여러 기업의 선택을 받았다는 우쭐함과 동시에 그때까지의 노력이 그제야 빛을 발하는 것 같아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변사람을 만날 때면 탈락 확률을 계산해보며 6곳 모두 동시에 떨어질 확률은 1.5%니까 최소 한 곳 이상은 합격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다녔죠. 그만큼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니, 확신에 가까웠습니다. 이대로 내 앞에 탄탄대로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12월 찬바람이 반지하 원룸에 스며들 때쯤, 며칠 간격으로 온 메일은 저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메일 내용은 하나같이 똑같은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귀하의 역량은 우수하나...’
처음에는 얼떨떨했습니다. ‘이게 현실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고,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만 같은 몽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둘씩 들리는 주변 사람들의 합격소식은 몽상을 내리치는 차디찬 현실의 망치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얻어맞으며 ‘이건 아니야’라고 절규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초겨울 찬바람에 진한 입김이 나올 쯤엔 장으로 있던 취업스터디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극도로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짜낼 눈물마저 말라 있었고, 슬프기보다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취업이 잘 풀리지 않던 스터디 팀원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곤 했던 내가, 다른 사람은 비켜간 취업실패의 비극을 정면으로 맞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터무니없고 부조리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 때 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왜 하필 나에게’ 라는 피해의식이었습니다. 취업준비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잘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불행이 왜 하필 나에게 찾아왔을까. 흔히 ‘취업은 운’이라고 하지만 ‘단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을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운으로 모든 결과를 설명하기에는 그간 쏟았던 노력들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다른 이유가 있지 아닐까’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어떤 이유도 6곳에 모두 떨어져버리는, 희박한 확률이 빚은 황당한 드라마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취업이 잘 안 풀린 친구들도 있었지만 저처럼 극적인 경우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모든 생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처럼 저의 노력이 드라마틱하게 망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 였습니다. 사실 달리 이유가 없었죠.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로서 이성의 인식범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인과관계를 유추하여 상황을 재구성하며, 재구성된 상황이 이성의 범위 안에 있어야만 납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종교에서는 ‘원죄’, ‘카르마’, ‘인과응보’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나 신념마다 조금씩 설명의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설명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적 명제는 ‘우리 삶 속에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조리한 상황들이 존재하며, 이들 대부분 동기가 없는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성은 우리가 합리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세상은 그 자체로 카오스이며 하나의 거대한 부조리로 느끼게끔 만듭니다.
예를 들어 ‘묻지마 범죄’에 희생당한 사람을 두고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희생자가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연히도 범죄자는 그 시각 그 장소에서 살인하고 싶었던 것뿐이고, 우연히도 피해자는 그 순간 범죄자 옆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희생자가 특정 인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어떠한 합리성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 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묻지마 범죄’ 피해자의 입장으로 본다면 본인에게 닥친 불행이란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자 카오스가 아닐까요. 개인에게 닥친 불행이란 발신인 불명의 통보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비합리성의 세계에서 합리성을 열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과율로 가득 찬 카오스지만, 그 속에서 합리성을 가지고 코스모스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합리성으로 쌓은 코스모스 속에서 카오스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부조리함을 느낍니다.
예전부터 이 주제만큼은 꼭 써보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그리고 부조리를 정면으로 다룬 두 인물과 그들의 작품 한 편씩을 소개할까 합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소개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전 세계 영화감독 중 ‘스릴러’를 가장 잘 찍는 감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엔 형제와 『싸이코』의 히치콕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나, 사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해 우열을 가리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한국영화감독 중 ‘스릴러’를 가장 잘 찍는 감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사람을 꼽을 수 있는데, 바로 『추격자』, 『황해』, 그리고 최근 개봉작인 『곡성』을 연출한 나홍진 감독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스릴러’란 장르를 참 쫀득쫀득하고 스타일리쉬하게 빚어낼 줄 아는 감독입니다. 관객을 휘어잡는 몰입도와 긴장감,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전개, 캐릭터의 내면을 극한까지 끌어내면서도 플롯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런가하면 핸드헬드로 표현하는 인물의 심리, 클로즈업으로 표현하는 긴장감 등 촬영 기법부터 시작해 플롯을 고려한 공간활용, 소품배치 등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아주 치밀하고 짜임새 있게 작용하여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데 장인입니다. 이제 고작 3편의 필모그래피를 써내고 있는 감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장점이 많아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생긴 분이지?’ 하며 구글 이미지 검색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장점들이 더 있겠지만 제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어둡고, 음습하며, 염세적인 세계관 때문입니다.
나홍진 감독의 세계관에서 ‘불행’이란 굉장히 철학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장르를 불문하고 비극적인 사건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묘사되곤 합니다. 특히 등장인물이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이를 극복하거나 혹은 좌절하는 식으로 전개되기도 하며, 특정 사건과 만나서 불행이 증폭되거나 혹은 해소되기도 하는 식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 겪는 불행을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그 무엇’ 으로 전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던지, 국가가 위기에 처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나홍진 감독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불행은 이성의 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느 날 갑자기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위압적이며 압도적이고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묘사됩니다.
『곡성』의 스토리라인을 뜯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극 중 마을 사람들을 덮친 불행 앞에서 경찰, 언론, 병원 등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기력하게 표현됩니다. 무기력하다 못해 관객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관조적입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들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언론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추측성 보도를 쏟아내고, 병원에서는 환자들의 시체를 쌓아두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죠. 여러 종류의 무력감을 통해 곡성을 찾아온 비극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압도적인지가 표현됩니다.
성당의 신부에 이르러 무력감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주인공인 종구(곽도원 분)는 자신의 딸인 효진이에게(김환희 분) 찾아온 불행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악(惡)의 실체를 일본인으로 지목하고 귀신을 내쫒아야 한다며 종교의 힘을 빌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간청하는 종구에게 신부는 한심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직접 보셨소?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
신부가 무심하게 대답하는 이 부분을 보고 실소를 터트렸는데, ‘믿어야 비로소 보이게 되며 믿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종교의 속성인데 반해, 이를 종교인인 신부가 정면으로 반박해버리는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죠. 그럼 신부는 왜 직접 보지도 않은 신을 믿으려고 하는가요. 이처럼 마을 사람들은 피를 토하고, 온몸이 뒤틀려 죽어나가는 현실적인 비극에 처해있음에도 정작 불행을 겪는 당사자들도,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제3자인 관객들도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악(惡)의 실체가 불분명하며, 인간에게 닥쳐온 불행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철저하게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원인도 찾지 못하며 그저 덮쳐오는 불행을 바라만 볼 뿐입니다. 비극적인 불행 앞에서 인간의 존재의미란 수동태에 불과합니다. 유일하게 주인공인 종구만 뛰어다니죠. 그런 불행에 정면으로 반항하듯이.
하지만 종구도 결국은 자기가 사랑하는 딸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효진이를 살리려고 굿판을 벌리기로 결심한 종구는 일광(황정민 분)에게 찾아가 굿판을 문의하면서 “왜 하필 우리 효진이냐”며 묻는데, 일광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네는 낚시를 할 적에 뭣이 걸려 나올지 알고 허나?
그 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래미는 그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일광의 이 대답을 바꿔 말하자면 비극을 겪는 당사자가 ‘하필 효진이어야만 하는 이유’ 따위는 없다는 말입니다. 마을을 덮친 불행이 효진이에게도 찾아왔을 뿐이며, 효진이의 비극은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 라는 것입니다. 종구는 일광의 대답에 수긍하지 않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거예요. 인간은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납득하는 수 있는 존재인데, 눈앞에 보이는 딸의 끔찍한 비극에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 라고 설명하는 일광의 대답은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부조리했던 것입니다.
코스모스처럼 한 없이 단조롭고 평화로워 보였던 곡성이란 마을은 어느덧 갑자기 덮쳐온 연이은 의문사를 통해 카오스가 되었고 극 중에서 유일하게 종구가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간극을 인식하면서부터 부조리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홀로 반항합니다. 나홍진 감독은 종구의 존재론적 물음과 행동을 통해 삶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역설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포기한 듯 주저앉은 종구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운명이겠죠. 그리고 가족이 몰살당한 그의 집을 원거리에서 줌 아웃하여 결말을 담아내는 장면은 그러한 종구의 운명의 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의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곡성』이 개봉하자 의문사의 원인이 일본인의 주술이고 무명이 이를 지키는 마을의 수호신 같은 인물이라고 해석하는 영상이 나돌았습니다. 상당부분 일리가 있고 깊이도 있는 분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는 영화를 감상함에 그리 중요한 요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홍진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삶의 부조리함’이 아닐까요. 『곡성』의 효진이에게 불현 듯 찾아온, 이유 없는 불행처럼 우리는 살면서 여러 비극적인 현실에 마주치게 됩니다. 이런 불행의 대부분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그저 미끼를 물었을 뿐’인 우연성에 의해 결정되며, 부조리하게도 이런 우연성의 연속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구처럼 부조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반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반항이 곧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구처럼 우리는 끝내 이해에 닿지 못하고 부조리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즉, 나홍진 감독은 우리의 삶이 불행과 함께일 수밖에 없으며, 불행의 부조리함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실존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아, 자신의 영화에 이 정도 세계관을 담아낼 수 있는 감독이라면, 팬심을 가져도 좋지 아니한가요.
『페스트』의 도입부에서 까뮈는 소설의 주요 무대인 ‘오랑’이라는 도시를 ‘중성적인 장소’, ‘평범한 도시’, ‘권태에 절어 있으며’라는 표현들을 통해 도시의 평범함을 묘사하는데 꽤나 공을 들이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평범성을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곧 닥치게 될 페스트가 어떤 도시에서건 일어날 수 있다는 은유를 포함하는 것이겠죠. 나아가 『페스트』의 첫 문장은 ‘이 연대기가 주제로 다루는 기이한 사건들은 19XX년 오랑에서 발생했다(11p)’로 시작됩니다. 첫 문장부터 페스트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증언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죠.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까뮈는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페스트가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상황에서든 모습을 달리하여 벌어질 수 있는 부조리임을 지적함과 동시에 ‘너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어’라며 독자들의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까뮈의 철학을 『페스트』를 빗대어 본다면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1. Avengers Assemble !
소설 속에서 페스트가 발병하는 방식, 전개는 『곡성』에서와 같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며 오랑시의 코스모스를 깨뜨리면서 드러납니다. 페스트는 어떤 ‘합리’의 과정에서 발현되기 보다는 오히려 정 반대에 가까우며, 실제로 ‘부조리’의 뚜렷한 특징을 가진 현상으로 보입니다. 약 20여년전에 파리에서 발생했던 페스트도(53p)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 였으며, 오랑시에 발병한 페스트도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는 식으로 묘사됨으로써 ‘불행에는 이유가 없다’는 까뮈의 부조리 개념을 충실히 담습니다. 하지만 『곡성』과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오랑시의 어벤져스. ‘자원보건대’의 존재입니다.
자원보건대를 말하기 전에 우선 까뮈의 철학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곁들일까 합니다. 까뮈의 철학적 사유의 가장 큰 두 축은 ‘부조리’와 ‘반항’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간극에서 부조리가 태어나고 이를 인식하고 반항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 주장합니다. 나아가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맞서는 태도로 ‘반항’이외에 ‘자살’과 ‘종교’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살과 종교는 모두 우리가 추구해야할 행동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까뮈의 견해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부조리는 ‘합리적인 인간’과 ‘비합리성의 세계’라고 하는 두 항을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포함하는데, 『이방인』에서와 같이 ‘자살’은 필수적인 구성요소 중에 하나인 ‘합리적인 인간’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기에 부조리에 맞서는 진정한 태도가 되지 못하죠.
반면 ‘종교’는 ‘윤회’, ‘카르마’, ‘원죄’와 같은 구실로 지금, 여기, 현재의 세계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종교 역시 부조리에 맞서는 진정한 태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까뮈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부조리에 맞서는 태도로 반항을 선택해야할 지언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요. 까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그 유명한 주장을 합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즉, 까뮈는 반항의 연대를, ‘우리’의 형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페스트』의 자원보건대죠.
오랑시의 어벤져스, ‘자원보건대’에 가입하는 등장인물들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자원보건대에 가입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뜯어보고자 도입부부터 보건대가 조직되는 부분까지 유심히 읽어봤지만 놀랍게도 그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랑시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사이의 관계가 특별할 것이 없었어요. 리유와 타루는 스페인 무용수의 집에서 만난 사이에 불과하고, 그랑과는 병을 치료해주면서 알게 되었을 뿐이고, 랑베르와는 처음 만났고, 오통과는 겨우 이름만 아는 사이었으며, 파늘루 신부와도 그저 그런 관계였습니다.
리유와 인물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 간의 관계 또한 특징이 없었습니다. 가령 경제적 이유라던지, 개인적인 갈등이나 이해충돌을 보여주는 관계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돈독한 우정을 지닌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까뮈는 왜 굳이 교집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로 보건대를 꾸렸을까요.
아마도 보건대를 조직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은 되려 보건대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처럼 특별한 관계 속에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느슨하게 얽혀 있는 이들이 페스트라는 외부의 부조리에 맞서서 하나로 뭉치는 것, ‘우리’를 형성하게 되는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일부로 관계를 느슨하게 설정하진 않았을까요.
까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하는 인간’이란 ‘아니오’라고 말하는 자로 정의합니다. 그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요. 『곡성』에서 생각해본다면 마을 사람들의 ‘의문사’라고 볼 수 있으며, 『페스트』에서는 ‘페스트’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페스트가 전쟁, 질병, 혹은 그 어떤 불행을 상징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까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외부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반항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자원보건대는 동지애와 연대의식을 가지고 페스트라는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오랑시를 구하는데 일조하게 되죠.
: 2. 어벤져스도 결국 시빌워에 무너진다
자원보건대의 존재로 인해 『페스트』가 까뮈의 작품 중에서 가장 휴머니즘 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까뮈의 견해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곡성』의 ‘의문사’처럼 페스트는 오랑시의 ‘외부로부터’온 악(惡)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페스트와 같은 강력한 적이 올 경우, 내부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가 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즉, 외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내부의 서로 다른 우리가 뭉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하지만 악(惡)은 항상 외부에서만 오던가요? 소설 속에서 ‘우리’를 형성했던 보건대의 구성원들도 페스트가 물러간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개념자체가 불분명해지는 것이죠. 외부의 악(惡)에 대항해하기 위해 ‘우리’의 개념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내부의 악이 발현될 때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까요.
나아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시가 알제리의 ‘오랑시’임을 고려해본다면, 아랍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은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독립을 했던 알제리의 입장에서는 아랍인인 자신들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식민통치를 했던 프랑스인들이 자원보건대다 뭐다 꾸려서 페스트를 수습하는 전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로 대입해본다면 조선에 페스트가 발병했는데 점령군인 일본인으로만 꾸려진 자원보건대가 영웅처럼 활약하는 이야기랄까나요. 그 결과 자원보건대가 갖는 ‘반항하는 우리’로서의 존재론적 위상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보건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 여성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를 통해 보더라도 까뮈가 주장한 ‘우리’의 형성이 부분적인 사유에 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어벤져스에도 흑인인 블랙팬서나 여성인 블랙위도우, 스칼렛위치가 등장하는데도 말이죠.
: 페스트는 신의 징벌임(feat. 파늘루 신부)
소설 속에서 페스트에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파늘루 신부가 보여주는 종교적인 대처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타루가 보여주는 현실적인 대처방식입니다. 까뮈는 파늘루 신부를 통해 종교적인 대처방식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루의 대처방식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까뮈는 타루를 페스트에 감염시켜 죽이기 때문입니다. 파늘루와 타루를 한 명씩 들여다보면.
파늘루는 그의 첫 번째 설교에서 현재 오랑시가 겪고 있는 불행은 ‘신에게 대적한 결과로서 받게 되는 당연한 심판’이며,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은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129p)
그는 ‘불행이 악을 징벌하고 구원의 길을 닦아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악이 아니라 선의 봉사자가 된다’라며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파늘루의 생각과는 달리, 죄 없는 사람들마저도 페스트에 감염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페스트란 죄 지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람들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나쁜 짓을 일삼던 코타르를 페스트가 잡아가지 않은 것도 페스트는 신의 징벌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페스트는 단순히 신이 제시한 반성의 기회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오류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해 까뮈는 예심판사 오통의 아들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그려내고 있으며, 그 자리에 파늘루를 합석시킵니다. 그리고 파늘루로 하여금 신에 대한 믿음으로 페스트를 극복하려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만듭니다. 오통의 아들이 죽자 리유는 파늘루에게 화를 내며 “허,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계실 거예요!”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 부분에서 『곡성』에서 “왜 우리 효진이냐”며 절규하는 종구가 묘하게 오버랩 되죠. 사실 리유와 종구는 각각 파늘루와 일광에게 묻고 있지만 사실 목숨을 앗아간 부조리함에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통 아들의 죽음은 이 소설의 가장 큰 분기점이다. 죄 없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의사를 비롯하여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며, 이 죽음은 결국 파늘루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페스트를 바라보게 만든다.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보는 그의 태도는 죄 없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난 다음부터 달라진다. 그가 두 번째 설교에서 ‘여러분’이라 말하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의 심경 변화를 유추할 수 있다. 아무런 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어린아이를 직접 목격한 후 파늘루 자신도 신의 징벌을 선포하는 엄격한 사제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마주하게 된다.
: ㄴㄴ 페스트는 삶의 부조리임(feat. 장 타루)
페스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만, 까뮈는 특정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예심판사 아들의 죽음과 타루의 죽음이 특히 그렇다. 예심판사 아들의 죽음은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는 파늘루의 주장에 대한 까뮈의 묵직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죄 없는 어린아이가 죽었는데 파늘루 니 말처럼 이게 과연 신이 할 짓이냐?’며 항변하는 것이다. 반면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타루의 죽음은 페스트의 부조리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의 삶의 조건인 부조리를 드러낸다는 점에 있어서 타루의 죽음만큼 극적인 드라마는 없을 것이다. 나는 까뮈가 타루를 죽였기 때문에, 이 작품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까뮈는 왜 하필 페스트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항을 했던 타루를 죽였을까요. 그것도 페스트가 거의 사라질 무렵에 죽여야만 했었나요(불쌍하지도 않나;;). 『페스트』는 타루 외에도 리유, 그랑, 랑베르 등이 연대한 자원보건대의 헌신과 영웅적인 투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페스트가 들이닥칠 때도 그랬지만 잠정적으로나마 물리친 것도 자원보건대를 위시한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 였습니다. 단지 추위가 페스트를 꺾은 것입니다. 페스트를 물리친 것이 아니고 페스트가 알아서 물러난 것입니다. 페스트가 물러난 것은 오통 아들의 죽음과 파늘루의 죽음에서 보는 것처럼 신의 은총에 의해서도 아니며, 타루의 죽음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까뮈는 페스트라는 부조리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인간은 부조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받아들이는 존재다’라는 것을 타루의 죽음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페스트를 이기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정말 역설적이게도 마지막에 목숨을 잃었던 타루를 통해 부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곡성』의 종구 또한 효진이에게 닥쳐온 부조리함을 느끼고 극 중에서 유일하게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나홍진 감독은 종구를 죽이고 맙니다. ‘인간은 부조리에 앞설 수 없다’는 세계관이 까뮈와 나홍진 감독이 가진 교집합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왜 『곡성』과 『페스트』를 같이 소개하는지 아시겠죠. 나홍진과 알베르 까뮈, 『곡성』과 『페스트』는 다른 듯 하지만 사실 똑같은 주제를 가진 작품입니다.
『곡성』과 『페스트』에서의 종구와 타루의 죽음은 인간의 삶이 결코 부조리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종구와 타루는 극 중에서 가장 열심히, 치열하게 부조리에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부조리에 희생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구와 타루가 주인공인 이유는 있습니다. 부조리에 관한 까뮈의 철학에서 중요한 단어는 ‘의식’ 혹은 ‘깨달음’ 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전혀 부조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페스트』의 마지막 문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시내에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까뮈는 페스트의 속성을 모르는 군중들과 알고 있는 리유를 대비시킴으로써 페스트가 초래한 상황의 부조리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페스트는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군중에게 현재 상황은 부조리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리유에게는 페스트의 ‘잠정적 종말’이라는 현재의 상황은 부조리의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까뮈가 주장하는 ‘반항’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종구와 타루는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었기에 반항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원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이나 불행에는 딱히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최종면접 6개를 줄탈락 할 줄 알았을까요. 가장 치열했던 타루의 죽음처럼 그럴 리가 없는 일들이 실제 벌어지기도 하고, 효진이의 죽음처럼 가장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과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을 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놈의 ‘그냥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 라는 설명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든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부조리함조차 우리 인생의 일부분입니다. 이런 점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반항’도 할 수 있습니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세차게 자신의 삶을 포용할 수 있는 ‘반항’을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이자 선물이 아닐까요.
까뮈의 말로 포스팅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한 때 축구선수였고 골키퍼였던 까뮈는 자신의 경험을 인간의 삶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공은 절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