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마이클 샌델
엄마, 우리 몇 밤 자면 설날이야?
어릴 적 설날이 다가오면 나는 부단히도 어머니를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설날이 너무 기다려져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친척들을 보는 것이 좋아서였을까?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즐거워서였을까? 사실 그 당시 저에게는 친척이라든지 화목한 분위기라던지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없이 어리고 철이 없었기에 밖에서 노는 것만 생각했지 명절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설날만큼은 견우가 직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세뱃돈'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 설날은 공식적으로 허용된 외화벌이(?)의 날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세뱃돈에 대해 일절 터치가 없었던 터라 설날에 받은 세뱃돈은 매년 새 학기 학교에서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로 인해 1년 365일 용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참고서나 문제집을 살 때 조금씩 남기는 것도 어김없이 들통이 났던 터라 Official 하게, '세배'라는 작은 수고의 대가로 거금을 받을 수 있는 설날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죠. 요즘도 이따금씩 어릴 적 나의 세뱃돈 예찬을 두고 가족끼리 우스갯소리로 얘길 나누는데, 그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여 쓴 그림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답니다.
오늘은 설날. 너무 기분이 좋다.
오늘이 좋은 이유는 오늘은 돈이 굴러들어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식적인 외화벌이는 나이가 들어 세뱃돈을 받는 것이 무능력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쯤에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조카들에게 절을 받는 입장이 되어서야 옛날의 내 행동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얼핏 생각하면 '세뱃돈을 하니 돈이 굴러들어 온다'라는 표현이 귀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정말 뜨끔할만한 내용이죠.
세배를 처음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봅시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절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주위 어른들은 그런 제가 귀엽다며 돈도 조금씩 쥐어주셨겠죠. 하지만 세뱃돈을 받을 때마다 알게 모르게 세배와 돈이 교환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반복된 행동은 학습효과를 낳아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즉 이미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세배에 담긴 전통적, 가족적인 가치보다는 '세배 한 번에 만 원'이라는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를 인식했었고, 설날이라는 명절을 단순히 세배와 돈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조카에게 절을 받고 돈을 내미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집니다. '내가 조카들에게 세배를 했다고 돈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혹 어릴 적 나처럼 명절을 세뱃돈 받는 날이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내가 주는 돈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질 수도 있는 전통적이며 가족적인 가치를 밀어내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한 권의 책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마이클 샌델의『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소개합니다.
위의 세뱃돈 사례와 같이 저자는 우리 삶 속에서 바람직한 것들에 대해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것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시장은 단순히 재화를 분배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교환되는 재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드러내면서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책을 읽게 하는 행위는 아이들의 독서량을 늘리게 만들 수 있을진 몰라도 독서를 통해 얻는 정신적 만족이나 기쁨 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약이 지속적으로 처방되면 독서는 아이들에게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노동에 대한 대가가 없다면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기부금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사례 또한 대학 재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대학의 품위와 공정성에 대한 가치를 해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장가치는 우리가 본래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바람직한 비시장가치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시장논리를 주의해야 되는 이유는 시장은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장은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이 다른 것보다 기준이 높은지, 혹은 도덕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성매매를 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한다면 경제학자가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은 "가격이 얼마에 형성되었죠?"일뿐입니다. 시장은 훌륭한 선택과 저급한 선택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거래하는 쌍방은 교환 대상에 어떤 가치를 둘지 스스로 판단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는 우리 주변부터 시작해서 무엇이 시장에 속한 영역인지, 무엇이 시장과 거리를 두어야 할 영역인지 '토론하기'를 주장합니다. 건강, 교육, 가정생활, 자연, 예술, 시민의 의무와 같은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을 결정해야 하며, 이는 경제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이면서 정치적인 문제이기에 시민 사회의 건강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공생활과 개인 관계에서 시장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까? 어떤 재화를 사고팔아야 할지, 어떤 재화가 비시장가치의 지배를 받아야 할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돈의 논리가 작용하지 말아야 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등 여러 토론 주제를 통해 사회적인 합치점을 고민해보자는 것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만만찮은 책이라는 예감이 벌써부터 오는 것 같죠? ㅎ
시장가치의 광폭횡보(?)는 이미 우리의 일상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인센티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저자는 인센티브의 효용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금연과 비만 사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매년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에서는 금연, 비만과 관련해 수천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2016년 보건복지부 금연정책 예산 : 1,365억 원). 하지만 집행하는 예산에 비해 효과는 미미한 편.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금연 시, 다이어트에 성공할 시 직접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큰 단위의 돈이 지출되는 의료정책 비용에 비해 실제 성공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지원을 하니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며 효과도 직접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수혜자 입장에서도 확실한 동기부여가 된다고 생각되어 정책 시행 초기에는 각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날이 갈수록 중도탈락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 성공하여 보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금방 다시 흡연을 한다거나 비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윈윈처럼 보이는 이 정책에는 어떤 결함이 있었을까요. 저자는 금전상의 동기가 더욱 바람직한 다른 동기를 밀어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은 콜레스테롤 수치와 체질량지수를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적 행복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계발하고 돌보고 존중하는 마인드인 것이다. 하지만 금연한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행위는 이러한 행동을 키울 수 없고 오히려 해칠 수도 있다. 이는 뇌물이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하기 때문이다. 뇌물은 수혜자를 설득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내재적 이유를 외재적 이유로 대체한다. '담배를 끊거나 체중을 감량해야 하는 웰빙에는 별로 관심이 없죠? 그렇다면 내가 750달러를 줄 테니 그렇게 해요' 건강 증진을 위한 뇌물은 우리를 속여서 어쨌거나 해야 하는 일을 하도록 만든다. 뇌물은 잘못된 이유로 올바른 일을 하도록 우리를 꼬드긴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담배를 끊거나 체중을 감량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 뇌물에 조종당하는 상황은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뇌물을 받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인센티브의 효용론과 관련해서 예전 경영학과 수업시간에 봤던 TED 강의가 생각났습니다. 다니엘 핑크Daniel Pink라는 미래학자가 동기부여에 관한 놀라운 실험 결과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실험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어떤 과제를 내주고 성과에 따라 금전적 인센티브를 지급합니다. 조금 잘한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보상을, 중간 정도의 성과를 낸 사람에게는 중간 정도의 보상을, 최고의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보상을 지급하는 실험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보상이 클수록 성과도 클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경제학자로 꾸려진 주최 측을 포함하여 우리의 상식을 보기 좋게 뒤엎어 버렸습니다. 실험 초기 단순하고 기계적인 과제에는 인센티브가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으나, 창의적이며 인지적인 능력을 조금이라도 요구하는 과제일 경우 보상이 가장 큰 그룹의 성과가 가장 나빴습니다(작은 보상과 중간 보상 그룹의 성과 차이도 거의 없었다). 다니엘 핑크는 인간은 금전적인 보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동기부여는 인간의 주도성, 전문성, 목적성에 의해 발현되며, 몇 가지 관련 사례들로 이를 뒷받침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합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주도성. 의미 있는 것을 좀 더 잘하고 싶은 전문성.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하고 싶은 목적성. 다니엘 핑크가 주장하는 이런 요인들이 센델이 줄기차게 말하는 비시장가치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인센티브가 동기부여를 이끌어내고, 큰 인센티브가 큰 성과를 만들어낸다고 믿고 있지만, 인간의 동기부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 복무를 합니다. 일생에서 중요하면서도 소중한 시간. 20대의 일부분을 국방의 의무를 위해 희생합니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희생이 뒤따르기에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성한 의무라고 해서 그 현실까지 깨끗하거나 고결하진 않습니다. 30kg에 육박하는 완전군장을 메고 게거품을 물때까지 뛰는 완전군장 구보, 밤새 얼어붙은 군화를 녹이면서 하루를 시작했던 혹한기 훈련, 매일 밤 보일러실에서의 욕설과 갈굼 등.. 욕이 터져 나오는 매 순간들, 그것들의 총합이 아마 군대라는 곳일 것입니다. 이런 희생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하기 위해 만든 것이 군가산점 제도입니다. 이는 군 복무를 한 사람이라면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7, 9급 공무원 시험이나 공기업 시험 응시자에게 복무 년수만큼 혜택을 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사실 헌법상 군 복무는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 특별한 '희생'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이기에 그 어떤 보상도 해줄 근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헌법적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국민 정서상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군 가산점 제도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군복무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는 '전역퇴직금법'까지 논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저는 의문을, 그리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을 꼭 이런 인센티브로 풀어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그게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몇 년 전 잠깐이지만 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 생활 중 여러 가지를 느꼈지만 그중에서 크게 다가왔던 것은 미국인들의 '군인에 대한 예우'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현충일이지만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respect으로 가득 차 있었던 Veterans Day부터 시작해 동네마다 거의 하나씩은 있었던 Veteran park. 군대와 관련된 이름을 차용한 관광명소인 'Navy pier'와 94' 미국 월드컵 경기장이었던 'Soldier stadium' 등등. 군인/군대를 기리는 여러 상징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징물보다 더 충격적이고 부러웠던 것은 참전용사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심, 또 그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국민 정서였습니다. '아 우리나라도 이런 정서였다면, 군생활이 힘들어도 소명의식으로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가 가장 팽창되어 있는 나라에서, 군인에 대한 시각은 비시장가치가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군인을 군바리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저는 국방부가 이 부분을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을 바라볼 때 군바리가 아닌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희생하는 그 누군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군인에 대한 최고의 예우이며 보상입니다. 국방부가 군 사기진작, 처우개선을 위해 힘써야 하는 방법은 월급을 올려주거나 역차별을 낳는 가산점제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내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작 얼마 되지 않는 금전적인 인센티브에 국방의 의무라는 바람직한 가치가 밀려나가기 전에 말이죠.
이번 서평은 늘어지는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시장가치와 비시장가치 개념을 꺼내기 위해 어릴 적 세뱃돈 얘기도 했고, 인센티브의 효용도 짚어봤고, 뒤이어 군 가산점 제도와 그 대안에 대한 생각까지.. 주절주절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책을 읽고 고민했던 것들 중 50% 정도만 겨우 풀어낸 것 같습니다. 만약 모두를 풀어내려고 작정했다면 쓰다가 지쳐 낙오하지 않았을까요.. 작성 중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 적절히 타협(?)을 해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잘한 결정인 것 같네요..ㅎㅎ
아마 다른 분들도 이 책을 보면 '그래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뭔데?' 하는 의문을 품으실 것 같습니다. 책이 끝날 때까지 샌델은 답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런저런 사례를 계속 던져주면서 '이건 어떻게 생각해?' '그럼 이런 건 옳은 걸까?' '니 생각은 어때?' 하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같은 느낌이랄까요.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그 어떤 대학교 강의보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책장을 넘겼던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땐 샌델과 한 바탕 큰 토론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행복하더군요.
자본주의, 즉 시장가치는 우리의 삶으로 팽창할수록 도덕적, 윤리적 문제와 더욱 얽히기 마련입니다. 이런 문제를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두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바로 지금, 자본주의가 가득 팽창하고 있는 현시대에 한 번쯤 우리 스스로 고민해보아야 할 주제들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아낌없이 추천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