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파울로 코엘료의 출세작인 『연금술사』는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싶어 양치기가 된 청년 산티아고가 겪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근처에서 보물을 찾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된 그는, 자신의 꿈을 좇아 모험에 나서게 됩니다. 때때로 안락한 삶에 안주하려는 유혹도 찾아오지만 결국 말미에 이르러 자신만의 보물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 꿈을 꾸었던 고향의 교회 근처에서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여인과 함께 사랑을 이어가고자 다짐하는 것으로 소설의 막은 내립니다.
꿈에 그리던 보물도 찾고 사랑도 찾고 자아의 신화도 이루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해피엔딩입니다. 어떠한 고난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담금질한 산티아고. 산티아고야 말로 자신의 인생을 찬란한 금으로 바꾼 삶의 연금술사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런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었기에 1988년 작품인 『연금술사』가 2000년대 전 세계적으로 차트역주행(?)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런데, 많이 팔리고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이 훌륭하다고 느껴지진 않습니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연금술의 세계관은 일종의 사기극처럼 느껴지고, 중구난방인 종교적 레퍼런스들은 별 의미 없이 소멸합니다. 핵심 주제를 꿰뚫지 못하는 명언들의 향연, 평면적이고 기능적으로 행동하는 등장인물, 소설을 구성하는 짜임새 등이 지나치게 단조로워 ‘가뜩 힘을 준 B급 영화’ 같은 느낌입니다.
10년이 훌쩍 지나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땐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불쾌함 드는지 자문하지도 않은 채 책을 덮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상세히 써보려고 합니다. 10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여전히 싫다는 건 이 책과 저와 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불쾌감을 느꼈는지 정리해본다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좋게 말해서 그렇고 사실은 분노의 후기-_-)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왜 싫었냐면요...
『연금술사』는 제목도 그렇거니와 직간접적으로 연금술이 자주 언급됩니다. 산티아고의 동료인 연금술사, 금을 만드는 장면, ‘현자의 돌’ 등 연금술과 관련된 소재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뜯어보면 연금술은 레퍼런스 차원을 넘어서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세계관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연금술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곧 이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라고 판단됩니다.
이해를 곁들기 위해 연금술을 조금 들여다봅시다. 일반적으로 광물을 금으로 바꾸는 기술을 연금술로 알고 있는데, 사실 연금술의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연금술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은 영원성을 지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광물 또한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숙성되고 영원성을 획득하고자 하는데, 그 최종 지향점이 금Gold인 것입니다. 납이든 구리든 돌멩이든 모든 광물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두 금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금술사는 금을 완전무결한 물질로 인식했고, 금이 되기 위해 일반 광물이 거쳐야 할 수많은 세월을 연금술로 단축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연금술사에 대해 ‘돌을 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란 오해가 생겼습니다. 사실 연금술사는 그저 돌멩이를 금으로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화학적인 작용을 통해 어차피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금이 될 돌멩이를 좀 더 빨리 변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연금술사는 시간을 조정하려는 사람인 것이죠.
그렇다면 연금술사는 왜 이런 실험을 했을까요. 돌멩이를 금으로 변환하는 기술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연금술은 기독교의 구원 사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태어나는 동시에 죽어갑니다. 1분 1초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이기도 했던 연금술사들은 광물을 금으로 변환시키는 비밀, 즉 유한한 시간 속에 갇혀있는 사물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여 인간 역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연금술과 불로장생과 관계를 맺게 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불사의 존재가 된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구원이라고 믿었습니다. 시간성을 초월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며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금술사는 대지 속에서 광물의 자연스러운 숙성 기간을 앞당기는 작업을 통해 ‘불멸의 순수성’을 획득하려는 사람들이자, ‘신과 하나가 되려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알맞을 듯합니다. 연금술은 육체적인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열망이었으며, 그 열망 표출의 대상이 광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인간과 신의 합일, 나아가 모든 사물과 하느님의 합일을 믿었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상이죠. 하지만 연금술은 애초에 과학이라기보다 믿음의 영역이었고 그 당시 자신의 일생을 연금술에 바쳤던 신학자, 과학자들이 꽤나 많았습니다(여담이지만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부터 중세 시대까지 꽤 유행하다가 18c 라부아지에가 연금술의 관 뚜껑에 못을 박습니다. 그래서 라부아지에가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하네요).
저자는 연금술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코엘료는 생명이 없는 광물이 자신의 최종 지향점인 금이 되고자 하는 것은 광물 각자의 열정을 추구하는 것, 즉 소설 속 표현으로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것이라 말합니다. 광물마저도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지언데, 인간도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열정을 잊지 말고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책 전반에 걸쳐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연금술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아의 신화(시간의 영원성)를 추구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소설의 말미에는 산티아고와 태양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너는 먼 곳에서 만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정말 지혜로워. 하지만 사랑은 모르는 것 같구나. 천지창조의 엿새째가 없었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구리는 언제나 구리이고, 납은 언제나 납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만물에게는 저마다 자아의 신화가 있고, 그 신화는 언젠가 이루어지지. 그게 바로 진리야. 그래서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존재로 변해야 하고, 새로운 자아의 신화를 만들어야 해. 만물의 정기가 진정 단 하나의 존재가 될 때까지 말이야.'
(중략)
'바로 그게 연금술의 존재 이유야. 우리 모두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연금술인 거지. 납은 세상이 더 이상 납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납의 역할을 다 하고, 마침내는 금으로 변하는 거야. 연금술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거야. 우리가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할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진다는 걸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 (241p)
코엘료는 둘의 대화를 통해 소설의 핵심주제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구리나 납이 금으로 변하는 것은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구리나 납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이 자아의 신화를 추구함으로써 단 하나의 존재가 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모든 피조물이 영원성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연금술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즉 ‘한시성에서 영원성으로의 변환’, ‘절대자로의 회귀’ 까지 『연금술사』의 핵심적인 플롯이 실제 연금술의 철학을 기반으로 짜인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문단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간다’는 말은 연금술로 비교하자면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과 하나 됨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돌멩이나 구리나 납이나 인간이나 모두 영원성을 획득하여 하느님과 합일을 추구하기에 모두 같은 지향점을 가진 존재이며, 모든 존재가 무한함을 얻고 하느님과 하나가 된 저편에는 ‘하느님이나 구리나 납이나 사람이나 모두 하나’라고 연금술에서 주장합니다. 이 소설 역시 연금술의 사상을 충실히 이어받아 ‘모든 것은 하나’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며, 산티아고가 갑자기 나루토처럼 바람으로 변한다던지 하는 변신술을 부리는 것도 이러한 철학적 사유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연금술에 의하면 산티아고나 바람이나 We are the ONE 이기 때문에요.
‘너는 바람이 될 수 없어. 우리는 너무도 다른 존재야’
바람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너와 함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나는 연금술의 비밀을 알게 되었어. 내 안에는 바람과 사막, 대양, 별들 그리고 우주에서 창조된 모든 만물이 존재하고 있어. 우리는 오직 한 분의 손으로 빚어졌고, 우리에게는 같은 영혼이 있는 거야. (236p)
실제로 저자인 코엘료는 한때 연금술에 심취해 ‘현자의 돌’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연금술사』 출간 2년 전에 이미 연금술을 다룬 『마법사의 일지』를 썼던 것을 감안한다면, 『연금술사』가 연금술의 사상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추측이 괜한 심증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연금술의 사상이 이 소설에 핵심플롯으로 사용됨으로써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점을 3가지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소설에는 ‘마크툽’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힘을 주어 등장합니다. ‘마크툽’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그것은 운명이다’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운명대로 정해져 있기에 산티아고는 고향을 등지고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아마도 모든 피조물이 시간의 영원성을 획득하려 하고,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을 추구한다는, 그렇게 되게끔 되어있다는 연금술의 논리에서 차용한 플롯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소설의 전제부터 ‘이성’의 영역이 아닌 ‘운명’의 영역에서 서술하고 있어 설득력이 굉장히 떨어집니다. 중요한 선택에 기로에 놓을 때마다 산티아고는 그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한, 신비롭게 나타나는 ‘표지’에 수동적으로 따라갑니다. 그러곤 모든 결과를 ‘마크툽’, 운명이라 여기는데 믿어야 이해할 수 있으며 믿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믿음에 가까운 선택을 하는 산티아고를 일반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아가 산티아고는 ‘표지’를 따라감으로써 자기 앞에 놓인 다른 대안에는 관심을 가지거나 심각하게 고뇌하지 않습니다. 사실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이성적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다면 다른 대안에 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할 것인데, 언제나 결정적인 판단을 내려주는 건 그의 ‘꿈’이자 ‘표지’입니다.
크리스탈 가게에서 안달루시아로 돌아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장면에서도 산티아고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110p)'라고 말합니다.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단 한 번입니다. 돌아갈 수 없기에 놓인 현실과 가지 못한 길 위에서 고민합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선택에 따르는 인간적인 고민을 작품 속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며, 믿음이 없는 나로서는 산티아고가 이상한 사람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결국 산티아고의 ’마크툽‘은 오아시스 여인에게 고백할 때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소설 전체를 연금술 사상에서 비롯한 운명론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그저 운명에 자신을 맡겨 따라가기만 한 산티아고가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들어준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초심자의 행운‘은 있었지만 ’가혹한 시험‘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해몽은 하지 않고 보물이나 뜯으려고 하는 노파, 삶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멜기세덱, 산티아고를 도와주는 크리스탈 가게 상인, 연금술에 심취한 영국인, 그리고 마지막 연금술사까지. 『천일야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산티아고 주변에서 평면적이고 단편적인 기능만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노파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멜기세덱은 뭐 하는 사람인지, 크리스탈 가게 상인의 과거는 어땠는지, 영국인은 무엇 때문에 연금술에 심취하게 된건지, 연금술사는 도대체 누구인지 소설이 끝나도 이들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그저 ‘산티아고 순례길의 부산물’ 정도로만 다뤄졌기 때문이죠. 소모품처럼 한번 쓰고 폐기당하는 인물들이 나열되어있어 이야기가 한없이 단조롭게 느껴집니다.
코엘료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는 가장 큰 교훈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니가 가진 꿈을 포기하지마. 자아의 신화를 추구해야 돼 ^-^’ 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노력했을 때 과연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응원할까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혀야만 되거나, 내 꿈과 극단에 위치한 다른 꿈이 서로 경합하는 상황에는 누구의 꿈이 우선인가요.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이루길 소망하는 꿈은 교육, 매체, 주변 인물 등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산물인데, 그 꿈이 나의 온전한 꿈이라 볼 수 있을까요. 꿈을 좇는데 따르는 노력을 온전히 고찰하지 않고 꿈 그 자체를 절대화하는듯한 이 소설의 분위기는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라 느껴집니다.
피라미드에서 보물을 찾겠다는 꿈은 이른바 ‘국제 도굴꾼의 꿈’인데, 그런 꿈을 집요하게 꾼 산티아고에게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여인을 안겨다 주는 저자의 의도에 수긍하기가 힘듭니다. 결국 이 소설은 개인의 꿈에 대한 얘기로는 해석하기가 힘들죠. 연금술의 철학에 근간을 둔 ‘절대자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이 그나마 적당하며, 이런 의도였다면 이 소설은 현대 소설이 아니라 종교 서적으로 분류했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언급한 단점 이외에도 무분별한 명언 남발, 짬뽕 국물 같은 종교적 레퍼런스 등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있었지만, 칭찬하는 것보다 비판하는 것이 더 힘들어 여기서 줄이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다. 『연금술사』는 성인 독자층을 겨냥하면서도 동화적인 플롯을 띈다는 점에 있어서 『어린 왕자』의 아류쯤 되고, 종교적 색채와 연금술의 철학이 저변에 깔려있어 종교 서적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성이 빈약하고 완성도가 높지 않아 좋은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세계적으로 많이 팔린 이유는 독자에게 복잡한 생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문장이 쉽게 쓰였으며, 적절히 그럴듯한 명언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잘생긴 사람이 ‘인기가 많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진국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역시 베스트셀러가 ‘인기가 있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좋은 책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화려한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면 유행에 밀려버린 고전이 더 간절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런 고전이 내 취향이라는 확신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