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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Nov 05. 2017

존엄의 장미가 피는 그날까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14년 2월, 송파구 한 단독주택 반지하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암 투병으로 일찌감치 가세가 기울었고 유일하게 생계를 이어오던 어머니마저 부상으로 수입이 끊겼던 어느 한 가정. 더 이상 출구를 찾기 힘들었던 세 모녀는 돌아가신 아버지 곁으로 가기 위해 번개탄에 불을 붙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월세 걱정, 공과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리고 이 사건은 사회안전망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송파 세 모녀 사건’이란 이름으로 회자되었습니다.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 3년 전, 세 모녀는 관할 주민센터에 찾아가 복지지원을 타진했었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만족하지 못해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시스템상으로 30세가 넘으면 추정소득이라고 하여 약 50만원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세 모녀의 추정소득이 수급자 선정기준을 넘었던 것입니다. 당뇨와 고혈압으로 몸져누워있던 큰딸, 아버지와 언니의 치료비를 부담하느라 신용불량자가 된 작은딸의 사정은 애초에 심사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당일을 하던 어머니가 퇴근 중 빙판길에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으나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실직하게 되면서 세 모녀는 희망의 끈을 놓고야 말았습니다.


송파 세 모녀 추모웹툰 中


  죽는 순간까지도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세 모녀. 무엇이 그리 죄송했던가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죄송하다’라고 해야 하는 걸까요.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로 정치권의 자각과 시민단체의 요구로 같은 해 12월 일명 ‘송파 세 모녀법’으로 불리는 3개의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조사만 그럴싸하게 했을 뿐, 실제 지원으로 연결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부양의무자 기준과 기초생활수급자의 진입장벽은 낮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신청 및 이의제기 절차가 복잡해졌습니다. ‘개정된 송파 세 모녀법으로도 송파 세 모녀를 구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말을 ‘죄송합니다’라고 맺은 세 모녀에게 아직도 마음의 빚이 있는 이유는 지금 상황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동산 활황이 불었던 바로 그 시기에, 다른 곳에서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힘없이, 절망한 채로, 무기력하게 죽음의 벼랑 끝에서 몸을 내던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빚을 지기 싫다며 꼬박꼬박 공과금을 내왔던 세 모녀에게 지금 우리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매년 추운 겨울이 다가올수록 술자리가 늘어가고 연말 기분이 한껏 오를 이즈음, 소외되는 사각지대의 세 모녀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오늘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합니다.



누구를 위한 복지인가


  켄 로치 감독은 소외계층이 현실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암전 상태에서 다니엘과 상담원의 전화통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주치의로부터 심장질환을 진단받은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전화를 하지만 상담원은 ARS 자동응답기처럼 매뉴얼에 있는 질문을 반복합니다. 상대방이 보이지 않은 채 전화기에 대고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증명해야 하는 다니엘의 상황. 그리고 암전으로 처리된 그 장면은 시스템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직수당을 신청하러 간 다니엘은 인터넷 좌석이 만석이라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영화의 시선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발걸음을 따라갑니다. 통째로 들어내어도 될법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1분 정도 할애한 이유는, 갈 곳 없이 떠도는 다니엘을 조명하는 것이 곧 현대사회에서 그가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이력서를 넣고자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 영화에서는 1분이었지만 실제 그의 삶에서는 제도 사이에 끼어버린 무기력한 자신을 마주하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인 것이죠.



  다니엘은 아내가 사망하기 전까지 수발했던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목수로 살아온 성실한 사람입니다. 촛불 하나로 방을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쓸모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지 시스템 앞에서의 그는 철저하게 ‘쓸모없는 사람’으로 둔갑합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상담원에게 자신이 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항변하거나, 식료품 지원소에 줄을 서거나, 혹은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허위로 이력서를 넣는 것뿐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지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고 냉엄하게 묻는 복지 시스템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고백해야 하는 상황은 가지고 있던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 꿇게 만듭니다.


  켄 로치는 다니엘이 좌절하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부당하게 당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관객의 감정에 기대는 그 흔한 최루성 장면을 단 한 컷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찰자의 시선으로 묵묵히 영상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곤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 복지라는 시스템이건만 오히려 그 시스템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현 상황이 옳은 것이냐고사람을 위한 시스템이지만 사람이 없는 시스템에서 소외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람 위에 시스템이 있을 때 발생하는 부조리한 상황들을 담담하게 연출해내는 영상을 보면 켄 로치가 왜 거장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싱글맘 케이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케이티는 런던에서 노숙자로 전전긍긍하다 뉴캐슬로 겨우 집을 구해 이사 오게 됩니다. 하지만 약속시간에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상담을 받지 못하는데, 이 장면은 영화 시작 부분에서 다니엘이 전화로 통화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사람이 부재한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의 무기력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케이티의 경우 아이들을 집에 두고 혼자 방문하는 상황을 연출했어도 됐을 뻔했는데, 굳이 아이들과 같이 온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거대 시스템 앞에서 절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케이티의 현실은 방통대에 진학하여 꿈을 펼치기는커녕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기 바쁜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식료품 지원소에서 케이티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이전까지는 아무리 굶주려도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거나, 혹은 다니엘에게 식사를 양보하는 등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과 배고픔이 날이 갈수록 커지게 되면서 식료품 지원소 장면에 이르러서는 통조림을 보고서 허겁지겁 집어삼켰는데, 먹다 보니 그간 자신이 지켜왔던 존엄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야 맙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지만, 자신의 비참함을 여실히 깨닫고 존엄을 내려놓은 후에 흘리는 케이티의 눈물은 관객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케이티는 식료품 지급소에서 생리대를 지급받지 못하는데, 생리대를 편의점에서 훔치다 발각되고 후에 이 사건이 성매매로까지 이어지게 되죠. 시민단체의 호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가난의 자력구제가 힘들다는 것을 생필품인 생리대 하나로 모두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는 순간,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존엄성


  극 중 다니엘은 케이티의 아들에게 ‘상어와 코코넛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상어로 연상되는, 당장 눈앞에 위협이 보이는 의식주에 대한 고민보다 ‘복지’라는 허울 좋은 희망인 코코넛이 더 위험하다는 은유를 내포하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복지란 비참함을 증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인가복지란 시혜가 아니라 권리일 수는 없는가요. 영화를 통틀어 켄 로치가 묵직하게 던지는 직구를 어쩐지 제대로 받아내기가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연대는 필요하다


  이 영화가 다니엘과 케이티를 통해 좌절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어둡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케이티에게 손길을 뻗었던 주변 사람들과 연대 덕분에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옆집에 살면서 세대를 뛰어넘는 말동무(?)였던 차이나,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목공소 동료, 그리고 소소하게 관공서에서 컴퓨터 하는 것을 도와주었던 사람들 등.. ‘사람’이 부재한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세심한 배려가 인상적이었는데, 생필품 배급소에서 ‘배급’이니 ‘지급’이니 하는 단어를 쓰지 않고 ‘쇼핑’이라는 단어사용과 함께 쇼핑을 도와주기 위해 직원이 따라나섭니다. 그런가 하면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쳤을 때 그 물건들이 생리대 같은 생필품임을 알아보고 ‘가난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그냥 돌려보내는 담당자. 그리고 복지 ‘시스템’이 문제이지 담당자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복지과 직원 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래도 세상이 살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켄 로치는 결코 시스템 속의 담당자 개인을 지적하진 않는다


  그렇게 보면 시스템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켄 로치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 간의 연대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시스템이 불완전하여 소외당하는 사람이 생기지만, 서로 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 칠을 할 때 가장 먼저 그의 손을 잡은 것은 비슷한 처지의 실업자였습니다. 다니엘이 항고를 준비할 때 그를 도왔던 변호사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다니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평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음에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등장시킨 것으로 짐작건대, 켄 로치는 연대를 부르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나아가 다니엘과 케이티 가족이 걸어가는 영화 포스터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잘 드러나는데, 비록 좁은 골목길처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운신의 폭이 좁고 험난할지라도 서로 맞잡고 단단히 붙어나가는 연대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영화 포스터 한 장이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영화의 시작은 다니엘의 상반신을 비추는 쇼트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다니엘의 시각, 생각 등이 케이티나 복지과 직원 등 옆 사람에게로 번져가며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다니엘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비록 다니엘은 죽고 없지만 그가 부르짓었던 '연대', 그리고 연대를 통한 '희망'은 내용이 진행될 수록 많은 사람들에게로 전파가 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져 작품의 구성 또한 켄 로치가 주장하는 바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를 밀어내는 복지인가


  켄 로치는 복지 시스템에서 희생되는 개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스템이 전적으로 엉망이다’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복지가 가장 발달한 나라를 꼽으라면 북유럽 국가를 꼽지만, 이런 나라들의 특성이 이민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이주민과의 갈등이 심한 폐쇄적인 근대 민족국가형 복지 모델을 삼고 있어 논외로 한다면,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로 대변되는 복지의 선진국은 영국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영국의 복지 시스템인 NHS 시스템 또한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모델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6년 브렉시트로 화두가 된 영국의 복지문제를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게 볼 여지가 있습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EU 개발도상국의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특히 시리아 난민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는데, 영국에 유입되는 수많은 이주민과 이민자들은 영국의 복지제도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낳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EU 가입국 국민이라면 타국에 거주하면 그 나라의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바로 영국의 복지 혜택을 해외에서 온 이주민들이 차지했습니다.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수급자는 많아지니 적자행진 및 품질저하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었고, 이주민들은 ‘무임승차자’로 낙인찍혀 기존 구성원들과 갈등을 쌓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이 나오지만, 글로벌시대인 요즘 요람과 무덤이 각기 다른 나라에 존재할 수 있어 근대 민족주의형 복지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이 영국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복지라는 것이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가며 경제활동인구의 생산성 및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아동복지에 투자했더니 아동이 성인이 되어 다른 나라에서 경제활동을 한다거나, 비경제활동인구의 대량유입으로 세수가 부족할 땐 복지시스템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요.


무임승차자인 이주민들을 밀어내는 정책과 NHS 개혁은 같은 말이다


  평생 성실하게 납세하고 노년이 되어서 자신의 권리인 복지를 찾으려 했지만 다른 국가에서 온 이주민들로 인해 그 권리가 줄어든다면? 브렉시트에 찬성한 여론 중 다니엘과 같은 노년층의 찬성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은 NHS 및 이주민을 대하는 영국의 시선에 대해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존엄을 지켜달라며 항변했지만 외려 정확히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이주민을 밀어내는데 가장 먼저 앞장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밀려 나간 이주민들의 존엄은 누가 돌보아줄 것인가요. 글로벌 시대에 자본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지만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는 불가능한 이상일까요. 현실적으로는 영국의 수많은 다니엘들은 브렉시트 찬성으로 이미 이주민에 대한 복지의 문을 걸어 잠군 듯합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처지가 딱하고, 비참하며 이러한 그의 상황이 가슴 속 깊이 울리긴 하지만, 현실에서 다니엘로 인해 소외된 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총평 _ 존엄의 장미가 피는 그날까지    


  이 영화를 보고서 왠지 더 씁쓸합니다. 다니엘의 허망한 죽음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이주민들을 밀어내는데 가장 앞장서고 있지 않는가요. 나아가 송파 세 모녀와 비교해본다면 다니엘과 케이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극에서 연출된 그들의 상황은 송파 세 모녀 및 우리나라 취약계층보다는 상황이 나아 보입니다. 크진 않지만 그들에게는 기대 쉴 집도 있었고 도와줄 사람도 있지 않았나요.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송파 세 모녀와 같이 수많은 사람이 다니엘과 케이티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들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다니엘은 자신의 존엄성을 항변하기 위해 국가건물에 스프레이 칠을 합니다. 극 중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입니다. 그가 받은 처벌은 훈방조치로 끝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가 장애인 차별철폐를 위해 국민연금공단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 칠을 했었습니다. 영화처럼 훈방조치로 끝났을까요? 국민연금공단은 ‘인생은 실전이야 ***’라며 박대표에게 270여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라는 교훈을 손해배상청구서로 증명한 국민연금공단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먹을 것 외에도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무언가는 필요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장미도 필요합니다. 그 둘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입김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추운 겨울날.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곁에 그들은 항상 존재합니다. 켄 로치가 주장하듯 시스템이 채우지 못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건, 소외된 이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건 결국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또 다른 ‘사람’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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