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학창시절 교양수업 과제로 인생그래프를 그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보며 X축을 시간으로, Y축을 행복으로 놓고 무작정 그려나갔는데, 이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프에 들어가야 할 주요 사건을 어떻게 선별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나아가 몇 가지 사건들로 꼭짓점을 찍는다 하더라도, 그래프상에서 높낮이로 표현해야 하는지라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과제는 사뭇 진지해졌고,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철학적인(?) 고민을 거친 후에야 겨우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프를 그리면서 가졌던 고민들, 여러 가지 사건들을 선별하고 순위를 매기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을 대하는 ‘나’라는 사람의 관점이자 정체성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어떤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며 또 그렇지 않는지. X축 위에서 일렁이는 삶의 파랑은 지나온 삶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높게 위치한 꼭짓점은 역시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추억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 강렬함이어야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의 작품인 『원더풀라이프』는 인생그래프에서 어떤 추억을 가장 높은 꼭짓점으로 찍을 것인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극 중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장 소중한 순간을 꼽으라는 요청에 저마다 옛 추억을 돌이켜봅니다.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기억을 첫 번째로 꼽을 것만 같았지만 이들이 선택하는 단 하나의 장면은 일견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어린 시절 빨간 구두와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장면, 중학생 때 전차의 창문에서 날아오는 바람을 쐬던 장면, 엄마의 무릎위에 누워 엄마가 귓밥을 파주던 장면 등. 어찌보면 너무나도 소박하거나 일상적인,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었습니다.
인생그래프를 그릴 당시만 하더라도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라는 것은 ‘점’과 같이 어느 특정한 순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께 크게 칭찬을 들었던 순간이라든지, 대학입시/입사지원 결과가 합격으로 발표나던 순간이라든지, 혹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을 때 받아들여지던 순간이라든지 등. 그 순간의 도파민 분비, 아드레날린 분비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행복수치가 가장 높았던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원더풀라이프』에서 말하는 가장 행복이란 ‘선’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극 중의 이치로 할아버지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아내와 결혼이후 처음 영화관에 갔을 때를 꼽았습니다. 이를 이치로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는 결혼 전에 아내가 영화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회사 일에 바빴거나 혹은 모치즈키에 대한 질투로 인해 아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영화도 같이 보러간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긴 결혼생활을 통해 모치즈키에 대한 질투도 사그라들고 은퇴도 했을 쯤 처음 같이 나섰던 영화관람은 이치로가 아내를, 그의 결혼생활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인 날이었습니다. 그의 결혼이후 첫 영화관람은 비록 행복에 벅찬 순간은 아닐지언정 지난 40년간 옆에서 내조해준 아내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아주 일상적이면서도 40여년의 세월을 대표하는 추억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히로카즈 감독은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인터뷰이들의 선택이 결코 허무맹랑한 말이 아님을 연출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터뷰이들은 모두 망자(亡者)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가장 강렬했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아가 이미 죽은 사람일지라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을 통해, 방 안의 화분을 통해 이들이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즉, 삶이 있었고, 이내 죽음이 되었지만 다시 삶을 얘기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들의 이야기가 생명력을 얻으면서 지금 현재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관객들에게 소구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오히려 작품 속에서 어두운 명암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어떤 기억도 선택하지 못한, 남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인터뷰이가 앉을 빈 의자를 비춰주고는 똑똑하는 노크소리와 더불어 막을 내립니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의 끝에서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면서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 살면서 가장 소중한 추억은 무엇인가요.
이 영화가 인생그래프를 그리면서 추억들을 선별하고 순위를 매기는 과정을 통해 단 하나를 선택하는, 철학적이면서 (선택받지 못한 사건들 입장에서는)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극찬을 받는 이유는, 영화의 막이 내리고 나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잠시 동안의 멈춤’이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조명하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