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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Jan 13. 2018

진정한 교사란

『디태치먼트』 토니 케이

  이 작품은 흔히 봐왔던 교육영화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나 「굿 윌 헌팅」, 「스쿨 오브 락」처럼 한 명의 위대한 선생님이 학생들을 개과천선 시킨다는 상투적인 내용이 아니라 공교육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08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로랑 캉테 감독의 「클래스」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영화의 완성도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작위적인 연출과 단편적인 등장인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비해 전체적으로 산만하다든지 등 명작의 반열에 끼기에는 살짝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연출에 대해서는 생각해볼만한 지점도 몇 보이기에 오늘은 플롯과 연출 부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소화해볼까 합니다.



일그러진 사람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아가 무너져내린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선생이나 학생이나 학교라는 공간에서 침몰하는 것처럼 보이며 가정에서도 그들은 매우 불행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감독은 이를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명이 대화하는 장면을 어깨를 걸어 찍거나 바스트샷으로 찍어도 될 법한데, 굳이 클로즈업으로 앵글 가득 담아내어 파편화된 개인과 그들이 느끼는 불안한 심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IMAX로 봤다면 모공이 보일법한 클로즈업


  주인공인 헨리는 어떠한가요. 그 또한 교사로써도, 한 개인으로써도 너무나도 망가진 사람입니다. 기간제 교사인 그는 담임으로 있는 반이 사고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며 학생들과의 사제관계를 ‘기간제 교사’라는 선으로 긋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은 텅 비어있고 학생들에 대한 애착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에게 학교란 그저 일반 회사원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직장’입니다. 비슷한 장면임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701번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헨리가 그저 직장으로 생각하고 학교를 다니는 것일 뿐, 어떤 막중한 사명감이나 학생들을 감화하기 위해서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3-4번 정도 반복되는 그의 출근 장면은 학교라는 곳이 신성한 곳이며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이 자라는 곳이라기보다는 그저 ‘일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영화의 시작부분부터 그가 학교로 첫 출근하는 장면까지 그의 등 뒤로 카메라워크가 따라붙는데, 복도에 이르러 교실에 가까워질수록 초점이 흐려지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학교를 생각하는 헨리의 심리뿐만 아니라 학교 그 자체도 이미 불투명한, 알 수 없는, 희망이 없는 곳으로 묘사되고 헨리는 그 속으로 억지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헨리는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인성조차도 엉망입니다. 그는 화장실 자물쇠를 빼놓지 않았다며 당직 간호사에게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무위도식자라며 폭언을 퍼붓습니다. 돈을 냈지만 그 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느낀 그는, 한 번만 더 할아버지를 그냥 놔두면 해고당하게 만들겠다며 협박까지 합니다. 이 장면은 바로 앞에 있었던 흑인학생 어머니가 동료 여교사를 모욕하는 장면과 정확히 대칭되는 장면인데요, 헨리와 흑인학생 어머니는 자신이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의료서비스/교육서비스) 때문에 상대방에게 모욕과 폭언을 하는데, 간호사에게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적어도 그녀의 말이라도 들어봤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헨리와 흑인학생 어머니의 공통점은 ‘내면이 무너져 내린 사람’이라고 느껴집니다. 이후 시볼트 선생은 선생이라는 직업의 단점이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이를 헨리와 간호사로 바꿔 말하자면 간호사는 돈을 받았으니 응당 의료서비스를 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 헨리는 감사의 인사는커녕 침을 뱉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 정도입니다. 헨리 그 자신이 타인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어찌 바랄 수 있을까요.


세상의 그 어떤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헨리가 다른 사람들과 깊게 교류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엄마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엄마의 죽음, 그리고 그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에서 헨리가 할아버지를 만나거나 혹은 엄마의 기억을 떠올릴만한 트리거를 접하게 되면 어김없이 플래쉬백으로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소환되는데, 예전 엄마와의 기억,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써 헨리는 이미 일그러진 사람입니다. 나아가 이런 트라우마가 헨리의 사회적 관계맺음에도 영향을 미쳐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attach되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detach되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화 내내 보이는 그의 성향으로 짐작건대, 오랜 기간을 두고 관계를 맺는 정규직 보다는 easy come, easy go 할 수 있는 기간제를 본인 스스로 선택했음은 쉽게 추측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물론 헨리뿐만 아니라 영화의 등장인물 모두 그들 각자 특유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면서 동시에 학교라는 공간에도 얽매인 채,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알 수 없는 벽에 쉴 새 없이 부닥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헨리를 구원하는 것은,


엉망진창이고 성격파탄자 같은 헨리는 이 영화에서 두 번의 구원 기회를 얻습니다. 하나는 메러디스이고 다른 하나는 에리카입니다. 단순히 기간제 선생을 하다가 어떤 학생과 잘 통했다거나, 우연히 길에서 만난 소녀라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연출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보입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색감을 이용해서 두 사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헨리가 플래쉬백으로 엄마와의 추억을 회상할 땐 항상 빨간색 이미지가 겹쳐서 보입니다. 아마도 엄마를 상상할 때 자연적으로 떠오르는 색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메러디스와 에리카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빨간색의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이는 감정적으로 깊은 교류를 맺었던 엄마와의 관계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메러디스와 에리카라는 인물이 엄마와의 관계만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암시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메러디스와 에리카를 단순히 헨리의 영혼 구원자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헨리의 캐릭터가 사회적 관계맺음의 파탄과 개인적 관계맺음의 파탄을 동시에 겪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메러디스와 에리카도 각각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쨌거나 메러디스는 학교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만난 사람이고 에리카는 제도 밖에서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에리카와 헨리의 관계는 학교라는 설정을 통째로 들어내어도 이야기가 성립하기에 헨리 개인적 자아의 구원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작품의 설정만 두고 본다면 헨리는 메러디스와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영화의 종반부쯤 에리카가 헨리의 일기를 보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학창시절 헨리의 그림들이 메러디스가 찍었던 사진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는 메러디스가 겪었던 고통을 헨리 또한 학창시절 겪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헨리의 상황이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변함이 없는 것으로 설정되었기에 메러디스와 헨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헨리는 자신이 기간제 교사라며 선을 그어놓았는데, 이를 넘으려는 메러디스를 밀쳐냅니다. 이는 아마도 깊은 관계맺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메러디스를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헨리와 메러디스는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헨리는 어찌하여 에리카를 받아들이게 되는가요. 헨리는 에리카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는데, 이때 극 중에서 유일하게 엄마와의 회상장면이 빨간색으로 덧칠되지 않은 생생한 칼라(?)화면으로 나옵니다. 엄마와의 추억이 붉은색으로 점철되어 있다가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을 만나고 나서 과거의 기억 또한 밝아지고 생생해지는 것으로 연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 영화의 최대 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헨리가 메러디스는 내쳤는데 왜 에리카는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황폐한 교실을 비추면서 끝나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 자아는 구원받았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자아가 구원받지는 못하는 구나’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개인적 자아가 구원받을 수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그냥 넘어감으로써 영화를 간신히 끌고 가던 플롯이 종반부에 이르러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보고서도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끝없는 질문들이 떠올랐으나 그 어느 하나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비행소년들을 지도하면서 녹록치 않은 교사들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무덤덤해져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만 입체적이지 않고 장치적으로만 소모되곤 합니다. 헨리를 비롯하여 여러 교사들이 처하는 상황은 제각각이지만 단편적인 묘사로 인해 교육에 관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며 오히려 학교와 교육이라는 설정을 통째로 들어내어도 무방한 장면들이 꽤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이 주인공 헨리의 심리적 문제로 치환되어 부수적으로 처리되면서 감성적인 연출만 허공에 붕 뜬 느낌입니다. 학교와 교육이라는 설정을 했다면 학생들이 엇나가는 이유 정도는 설명해야하고, 어찌하여 헨리에게 학생들이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정도는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닌가요. 학생들에게 아무런 애착이 없는 헨리는 좋아하고 남아서 끝까지 지도하는 동료 여교사에겐 침을 뱉는 것으로 연출한 감독의 의도를 쉽게 이해하기가 힘듦니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교사들은 모두들 어떻게든 학교를 살리려고 고군분투 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병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열의를 가진 교사들의 명단에는 헨리가 없지만 말입니다.



  진정한 교사라는 것은 어쩌면 관심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끌고 가기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DVD 선생님이나, 방과 후에 남아서 지도를 해주는 선생님이나, 혹은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선생님이 아닐까요? 이 영화에서 헨리의 교육방침이 매우 못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헨리를 바람직한 교육자처럼 묘사한 것에 대해 영화를 보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만약 내 아이를 맡긴다면 어느 교사에게 맡길 것인가. 저는 단호하게 헨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감상하고 난 뒤 느낀 생각은 CF감독 출신답게 연출은 실험적이나 산만하며 약간은 작위적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학교라는 배경을 들어내고 인간의 공허함에 초점을 맞췄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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