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일본인 M과 가까워졌을 때 였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의지할 곳 없이 지내던 중 만나서 그런지 유난히 정이 가던 친구였습니다. 몇 번의 겉치레 인사를 주고받다가 정말로 만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는데, 비록 여자 친구는 아니었지만 간만의 외출이라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약속 시간은 6시였지만 20분 먼저 도착했었죠. 그런데 10분 전이 되어도, 5분 전이 되어도 M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평소 일본인의 시간관념에 대해 들어왔던 터라 ‘혹시 내가 바람맞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디쯤이냐고 문자를 보내려던 찰나 그녀가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더군요. 6시 1분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녀는 항상 약속시간 정각, 혹은 1, 2분 늦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개중에는 진짜 1, 2분 늦게 온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변 매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한번은 제가 사는 집 앞으로 오기로 했는데, 분명 그녀의 차가 도착하는 걸 봤는데도 한참을 차안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각이 되어서야 초인종을 누르더군요. 왜 차 안에서 기다렸냐고 물으니 너무 일찍 도착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환송회를 해주고 싶다고 만난 자리에서 그 이유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말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약속시간에 대한 매너란 ‘정시’ 혹은 ‘정시보다 약간 늦게 도착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시간이라는 것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의 출발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이전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개인적인 시간이므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 매너라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습니다.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와 나 사이에서조차 약속시간을 대하는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대방에 대한 정신적인 부채를 극도로 꺼리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한 이후로 M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흥미가 붙어 여러 매체에서 귀 기울여 듣게 되었습니다. 주로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개념을 잡긴 했지만 아마도 오늘 소개할 이 책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가장 적합하게 설명한 책이 아닐까 해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에 대해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문화인류학 고전을 소개 합니다.
「국화와 칼」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보고서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패전이 코앞임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일본에 대해 미국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모습은 미국인들이 봐왔던 군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면이 포위된 상황에서는 항복하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결사 항전하거나, 혹은 갑자기 무릎 꿇고 자신의 배를 가르는가 하면 가미카제 같은 자폭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항복 선언을 받아내야 하는 미국이었지만 전쟁이 계속되면 될수록 늘어가는 사상자를 보며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연구를 요청하게 되는데,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국화와 칼」이라는 책입니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집필되었기에 이 책에서 다루는 일본의 모습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증적입니다. 일본을 방문할 수 없었던 베네딕트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혹은 포로로 잡힌 일본군과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행동 패턴과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덧붙여 일본인들만의 고유한 개념과 독특한 행동 양식을 파악해내고 있습니다. 책에서 언급하는 개념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저자가 일본인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세밀하게 분석하는 개념은 정신적 채무에 관한 개념입니다. 저자는 그 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온’, ‘기리’와 같은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며 일본인의 특성을 분석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온’이란 은혜를 뜻합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은혜’지만 일본에서의 ‘온’ 개념은 경직된 사회적 수직관계 속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행위를 말합니다. 긴 역사에 걸쳐 지방자치제였던 일본 사회에서 윗사람이 자신에게 베푸는 ‘온’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그 무엇입니다. 군주가 신하에게 ‘온’을 베풀면 그 ‘온’을 입은 신하는 반드시 군주가 내린 ‘온’ 이상의 노력으로 군주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거죠. 나아가 군가나 군주, 부모로부터 받는 ‘온’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무한한 개념인지라 평생 갚아나가야 하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이렇게 ‘온’을 갚는 행위를 ‘기리’라고 합니다. ‘기리’는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온’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기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 또다시 ‘하치’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하치’란 이른바 수치심이다. ‘온’을 입은 자가 그 ‘온’을 제대로 갚지 않는다면 주변으로부터 온갖 모욕과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일종의 사회적 생매장을 당하여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일본의 관습이었습니다.
저는 일본인의 특징 중에서 ‘하치’라는 개념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과 그에 대응하는 ‘기리’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으려면 ‘하치’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일본은 남에게 피해든 이익이든 아무런 관계없이 주고받는 것 자체를 매우 꺼리는데,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무엇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온’이며, 뒤따르는 ‘기리’와 ‘하치’는 일본인에게 피할 수 없는 부담이자 채무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 하더라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도움받는 것을 꺼리는 것도 이와 같은 연장선에 있습니다. ‘온’을 받으면 언제 또 같은 사람을 만나 ‘기리’를 할지 모르기에 자신은 평생 ‘하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하치’라는 독특한 개념 덕분에 일본에서 ‘온’을 갚는 행위는 강제될 수밖에 없었고, 역사가 반복되면서 일본 특유의 고유한 도덕 코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하치’라는 개념이 있기에 일본은 타인의 시선을 매우 중시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의 종교적(기독교적) 문화관습과 비교해볼 때 이러한 점은 매우 큰 차이점을 낳습니다. 서양의 관념이 선과 악, 이분법에 기초해 형성된 절대적 개념이라면 일본의 관념은 개인과 개인 상호 간에 발생하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인에게는 선과 악의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기독교에서처럼 ‘이것이 선이고 저것이 악’이라는 명확한 지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관계 속에서 인정받는 것이 사회관습의 제1목적인 분위기 속에서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이분법 규정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2차 대전을 복기해본다면 일본군은 천황의 군대이며 천황으로부터 ‘온’을 입은 군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한한 천황의 ‘온’은 일본군이라면 죽음을 다해 갚아야만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전장에서 항복하거나 도망친다면 ‘온’을 갚지 못한 채 평생을 ‘하치’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죽는 것만 못한 ‘하치’를 가지고 사느니 그들은 죽음으로써 천황에 대한 ‘기리’를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진짜 ‘하치’가 중요한 점은 ‘하치’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온’과 ‘기리’에 대해 부정한다 하더라도 ‘하치’를 벗어날 수는 없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천황에게 1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일본군, 더 나아가 일본 사회에서는 천황의 ‘온’에 대해 ‘기리’를 다하지 않는 모습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제 목숨 챙기고자 달아나는 행동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타인과 집단과 사회와의 관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얽혀 일본 특유의 ‘하치’라는 행동 양식을 만든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죽음으로 항전하다가도 천황의 항복 선언에 웃으면서 미군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읽었던 판본을 기억하기가 어려워 이번 기회에 을유문화사 판본으로 샀습니다. 책 뒷면에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에 대해 ‘국화(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전쟁)을 숭상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책’이라고 홍보하더라요. 그 문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을유문화사 홍보담당자가 아마도 이 책을 깊게 읽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제목만 보고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처럼 마케팅을 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국화와 칼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냐면,
국화는 '일본식 정원'으로 표현되는 일본인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인위적으로 꾸미는 조밀한 질서. 돌, 나무, 연못 모두 '알맞은 자리'에 아주 꼼꼼하게 배치합니다. 화분에 심어진 국화 꽃잎도 한 잎 한 잎 정돈하고, 때로 꽃 속에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철사로 고리를 끼워서 올바른 위치를 설정합니다. 이것이 국화의 본질입니다. 저자는 ‘위장된 자연’이라고 표현하지만, 강박적이라 할 만큼 설계된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온과 기리, 하치의 틀 속에 고고하게 틀어 앉아 균형을 지키는 것이 일본인의 특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이 칼이 공격성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이 책에서 말하는 칼은 일본인 자신과 동일시한 비유로 쓰입니다. 칼집에 들어있는 칼은 녹슬지 않고 늘 번쩍여야 합니다. 칼을 찬 사람에겐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칼은 녹이 슬기 쉽습니다. ‘몸에서 나온 녹’이 있다면 모두 자신의 책임입니다. 어떤 실패의 결과는 당연히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자는 일본적 의미에서 칼이란 이상적이고도 훌륭하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을 비유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도 해보곤 해요. 저는 ‘일본이 이렇다 저렇다’ 라는 지식보다는, 그저 개개인의 일본인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M을 이해할 수 있었듯이 말이죠. ‘일본의 대략적인 문화와 가치관은 이러이러 하다’까지는 지식으로 습득하되, 실존하고 있는 개인, 집단이 일본의 보편적 가치관 속에서 어떤 긴장감으로 생활하고 또 존재하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문화인류학이란 문화가 모든 사람들의 특징을 결정짓는다는 거대담론보다는 이질적인 문화의 사람들을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아주 기본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지금도 저는 일본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겐 여전히 이 책을 권하곤 합니다. 비록 일본을 지나치게 객관적이며 상징적인 지식으로만 받아들일 우려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대단히 귀중하고 훌륭한 책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