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9화. 헤어졌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람

세 가지 시간에 피어난 무지개를 담다

by 기록하는 엘리

1부. 과거 ― 기억이라는 비눗방울 (Day 1~10)

6~10일 : 기억에 남는 인연

Day 9. 헤어졌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람


— 미완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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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 뒤에 남겨진 풍경]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문을 열고 닫는다. 어떤 문은 환희 속에서 열리고, 어떤 문은 눈물 속에 닫힌다. 자서전의 아홉 번째 페이지를 채우며, 나는 이미 닫혀버린, 그러나 결코 잠그지 못한 문 너머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인연의 끝이 반드시 만남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리적으로는 헤어져 이제는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내 마음의 풍경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거나, 혹은 가장 어두웠던 한 페이지를 공유했고, 어느 지점에서 각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과의 인연은 '끝'이라는 단어로 매듭지어졌으나, 내 내면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의미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연의 성공 여부를 '지속성'으로 판단하곤 한다. 끝까지 곁에 남아야만 성공한 인연이고, 도중에 헤어지면 실패한 관계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구남친들과 헤어지던 날, 나는 인연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했다. 어떤 인연은 '완성'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과'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절인연이 있듯이, 지난 구남친들과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이별하는 법을 배웠으며, 누군가를 보내주어야 하는 성숙함을 익혔다. 그 마침표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완료'의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끝에서 배운 '시절인연'의 섭리]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지만, 정성을 다했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간관계에 대해 체념하는 태도를 갖게되곤 한다. “길지도 않을 인연, 굳이 왜 인연을 시작했을까"라는 허무함이 때로는 나를 짓눌렀다. 그때의 나는 인연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내 곁에서 사라지는 사람을 보는 것은 내 삶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고통과 같았다.


그러나 수많은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불교의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때가 있다는 것. 어떤 인연은 생의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나를 '통과'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난날의 인연들, 특히 뜨겁게 사랑하고 아프게 헤어졌던 지난 연인들과의 시간은 나를 성숙의 길로 인도하는 필수적인 통로였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나는 비로소 타인을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동시에 나 자신의 밑바닥을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이별의 과정을 통과하며 나는 누군가를 억지로 붙잡아두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기꺼이 보내줄 수 있는 것이 더 큰 사랑임을 익혔다. 그 시절의 아픔은 나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품을 가진 사람으로 빚어내기 위한 담금질이었다.


[내 영혼의 자양분이 된 소중한 파편들]


구남친들을 포함하여 시절인연의 사람들은 내 인생의 궤적을 바꾼 소중한 파편이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대화들, 함께 걸었던 거리의 공기, 서로에게 보여주었던 진심은 비록 결실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내 영혼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와 함께 읽었던 책의 구절은 여전히 나의 가치관 한구석을 지탱하고 있고, 그가 좋아했던 음악은 가끔 우연히 들려올 때마다 나를 그때의 순수했던 열정으로 되돌려놓는다.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미래는 비록 현실이 되지 못했지만, 그 꿈을 꾸던 시절의 내 눈빛만큼은 가짜가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억지로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를 할퀴었다면, 지금쯤 그 기억은 퇴색되고 변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헤어짐을 선택했기에, 그들은 내 안에서 변하지 않는 '미완의 아름다움'으로 박제되었다. 마치 완공되지 않았기에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우디의 성당처럼, 우리의 관계 또한 완성되지 않았기에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자라나고 있다. 그렇기에 인연의 유통기한은 끝났을지 몰라도, 그가 내 삶에 남긴 무늬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반짝이는 보석처럼 내 마음에 새기며 소중히 간직될 것이다.


[길을 잃을 때 나를 비추는 별]


헤어졌기에 더 애틋하고, 닿을 수 없기에 더 고귀하게 보존되는 기억들이 있다. 구남친들과 시절인연은 내 안에서 여전히 빛나는 별처럼 남아 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때, 혹은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냉소적인 어른이 되어갈 때, 나는 문득 마음속의 그를 소환한다. 그 별은 나에게 '그때의 순수했던 나'를 상기시켜 준다.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위해 밤을 지새우고, 작은 손편지에 온 마음을 담아 건네며, 사랑 하나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시절의 나 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시절, 또한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이토록 귀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14년 전의 그 시절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당시의 내 마음이 하루하루가 진심이었고, 생기가 넘치고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고 무너져내리기도 했던 시기이기 때문아닐까.


이별은 상실이 아니라 '간직'의 시작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그들을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그토록 아름답게 채워주었음에 감사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20대는 뜨거웠고, 나의 30대는 단단해질 수 있었다.


[맺음말: 모든 스쳐 간 인연들을 위해]


자서전의 이 페이지를 마무리하며, 나는 내 마음의 풍경 속에 거주하는 수많은 '헤어진 이름들'에게 조용한 인사를 건네고 싶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어쩌면 우리는 작은 먼지에 지나지 않겠지만, 우리들은 각자의 궤도를 돌다가 우연히 부딪혀 섬광을 일으킨 별들이었다. 그 섬광은 짧았으나 강렬했고, 그 빛의 잔영과 그림자가 지금의 나를 밝히고 있다.


비록 우리는 이제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고, 서로의 중년과 노년을 지켜봐 줄 수도 없겠지만, 내 안에 새겨진 당신들의 말투, 당신들의 취향, 당신들과 나누었던 눈물겨운 진심들이 이미 내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어 앞으로는 괜찮을 것 같다.


인연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완으로 남았기에 나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미완의 아름다움을 가지게 된다. 인연의 너머에서 여전히 내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스쳐 간 인연들에게, 그리고 그 시절의 나에게. 이제는 각자가 앞으로 나아갈 삶에 대해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나타났고, 가장 적절한 순간에 헤어졌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이제는 모두 다 잊고 행복하기를.


2025.12.30(화)

인연, 운명, 그리고 현재의 나에게,

기록하는 엘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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