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월 말에 접어들었다. 야심 차게 세운 계획과는 영 딴판으로 놀고먹기 바쁜 행복한 5월이다. 5월에 여름학기라 칭하니 어색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봄 학기가 1월부터 4월이고, 5월부터 8월은 여름 학기에 해당된다. 요새 날씨가 너무 좋아서, 숨 가쁘게 보낸 지난 두 학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해서, 휴식도 중요해서 등등 여러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들로 공부와 연구는 차일피일 미룬 채 세상 게으르게 지내고 있다. 남편 어록에 의하면, 박사생은 여름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야 오늘은 꿀 같은 5월 라이프를 담아본다.
최근에 개업한(?) 뒤뜰 카페다. 틈날 때마다 나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꽤나 충만하다. 커피 한 잔 풀어서 나가면 일단 풀 내음과 새소리가 감각을 채워준다.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경계를 푼 동물 이웃들이 제각각 다녀간다. 새빨간 새, 부리만 노오란 새, 다람쥐, 청설모, 토끼 등등 이웃이 한 둘이 아니다. 보고 있으면 너무 귀엽다. 대신 이웃들이 나타났을 때는 숨죽인 채,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조금의 인기척이라도 느껴지면 화들짝 놀라서 쏜살같이 도망가고 만다. 언제 또 집에 야외 테라스를 갖춰놓고 살아보겠나 싶어서 열심히 애용 중이다.
앉아서 멍도 때리고, 커피 마시면서 일기도 쓰고, 책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참 천천히 흘러서 좋다. 충만한 것과 별개로 학기 중에 내내 바쁘다 보니, 이런 여유가 주어지는 게 조금은 어색하고 불안하기도 한 듯싶다. 내 옷이 아닌 것을 입은 것 같고, 다시 열심히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남편은 할 일이 있든 말든 잘 퍼져 노는 스타일인데, 때때로 보면 스스로에게 쉼을 잘 허락하는 남편을 배울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소한 동네 산책이다. 5월은 동네도 참 아리땁다. 나무와 풀들이 푸르고 무성하게 잘 자라서 어딜 가든 다 예쁘다. 집이 언덕에 위치해있는데,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 곡선 진 동네 언덕길이 예뻐서 한 컷 남겨보았다. 매일 차로 출퇴근하며 지나치던 길인데 천천히 걸으며 보니 비로소 그 예쁨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사람은 여유가 중요하다.
최소한의 양심으로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듣고 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풀어져서 수업을 겨우 따라가고 있다. 곧 열 장짜리 페이퍼도 제출해야 하는데 흐아, 너무 하기 싫다. 놀고만 싶다! 일단 요구되는 것들만 제때 내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처음에는 대충 하는 것에 부적절감과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에라 모르겠다 모드가 되었다. 올 방학은 조금 놀겠습니다.
여름 농땡이 삶에도 단 한 가지 뿌듯한 것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에 나흘은 고강도 운동을 했다. 유산소+근력 주 2회, 테니스 2시간씩 주 2회 이렇게 구성해서 나름 꾸준히 했다. 확실히 남편과 테니스 크루들과 같이 하니까 약간의 강제성이 생겨서 혼자 운동을 결심할 때보다 더 잘 실천할 수 있었다. 운동은 가기 전에 매번 안 가고 싶고 오늘만 쉴까 싶은데, 막상 하고 나면 또 제일 하길 잘했다 싶은 활동이다. 매일 하기 싫음과 힘듦을 이겨낸 것에 뿌듯해진다. 여름 내 체력과 건강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운동 열심히 한 날에는 밥도 더 잘 챙겨 먹게 된다. 운동하고 와서 고단백 + 냉털 재료들로 차려먹은 집밥이다. 영양상태가 꽤나 좋은 유학생 부부다. 둘이 먹기에는 양이 상당히 많은데, 운동 직후에 배곯은 채 요리를 하면 필연적으로 과하게 차리게 된다. 결국 한참을 둘이 다 못 먹어치웠다. 이 사진을 보니 식비가 왜 많이 드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촤하하.
방학마다 넷플릭스를 부수고 있다. 최근에는 삼체와 브리저튼을 완주했다. 삼체는 상당히 신선하고 정교한 상상력이라 재밌게 봤다. 조금은 디스토피아적이라 우울하고 무거워서 마냥 가볍고 재밌는 컨텐츠를 선호한다면 다소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내용은 재밌었지만 공감/연민/인류애가 인간의 약점 혹은 이용당하기 좋은 특성으로만 묘사되는 것에 조금 아쉬웠다는 후문이다. 브리저튼은 기대 이상이었다. 사교계 짝짓기 포맷이 진부해지기 시작했던지라 새 시즌이 재밌을까 반신반의하며 봤는데, 여느 시즌을 웃도는 재미였다. 두 번째 파트도 빨리 보고 싶다.
다음은 또 다른 방학 메이트 밀리의 서재다. 위의 책 두 권 다 꽤 재밌고 유익하게 읽고 있다. 자기 계발서는 오글거리고 단정적인 표현에 거부감이 들어서 잘 안 읽는 편인데, 첫 번째 책은 자기 계발서 같은 제목이지만 에세이에 가까워서 퍽 즐겁게 읽었다.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대중음악 플랫폼들을 창업을 한 이력이 특이해서 어떤 삶인지 궁금함에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조금은 진부하게 셋업 된 커리어 루틴을 따라가는 직종에 종사하는 1인으로서 전에 없던 일자리와 직함을 창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재밌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하여튼 흥미롭고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틀을 뛰어넘는 방법은 배울 만하다. 이 길고 긴 공부를 끝내고 나면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생각해 보며 읽었다.
두 번째 책은 아들러인데, 이제는 심리학 대중 서적에서는 조금 뻔하다. 미움받을 용기 처음 읽을 때와 학교에서 개인심리학을 배울 때는 되게 매료되었는데 대중서가 많이 나오다 보니 유익한 부분도 있지만 식상한 부분이 많아졌다. 개인적인 편견이지만, 공부하는 분야랑 같은 분야의 대중서는 조금 물리는 것 같다. 휴식할 때는 영 다른 분야의 책들이 더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동기네 집에서 퍼즐 타임을 가졌다. 방학 중에 블루밍턴에 남아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기로 했다. 원래는 커피와 차를 마시며 퍼즐을 즐기기로 하였으나, 수다에 밀려 퍼즐은 열지도 못했다는 후문이다. 시골 마을에서 방학을 지내자니 여유로움은 좋으나 심심함은 덤이라서, 한 번씩 모여서 사는 이야기 주고받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친구 한 명은 패들 보트를 구입했다고 한다. 같이 호수에 타러 가야 하는데 한국 갈 날이 다가와서 같이 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미국인 동기들이 이토록 다정한 편이나, 때로는 욕심을 부려보면 프로그램 내 한국 학생 비율이 많아져서 한국인 모임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도 늘 한다. 아무래도 미국인 학생과 유학생은 같은 프로그램일지라도 고충도, 가치관도, 문화도 다른 부분이 늘 존재하는 것 같아서 공감대가 있는 사람들이 프로그램 안에 더 많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분야 자체에 한국인이 많지 않은 것을 어쩌랴 싶다.
남편과 나리와 야외 테라스 자리에서 근사한 브런치도 먹고, 가족들 선물을 사러 아울렛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돈을 아끼려고 방학 내내 거의 집밥만 먹은 덕에, 오랜만의 외식 플렉스에 행복했다. 날씨도 딱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야외에 앉아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기 딱 좋았다. 나름 블루밍턴 브런치 핫플레이스에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아울렛을 거닐며 선물도 샀다. 돈 쓰고 노는 일은 왜 이렇게 즐거울까? 그렇지만 이 길에 오른 이상 돈은 진즉 포기했기에, 소확행에 가치를 두며 살아가 보리라 다짐한다.
아울렛을 갔다 올 때마다 들르는 브루스터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찐득-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까지 퍼먹고 왔다. 셋 다 해야 할 시험공부/수업 과제는 않고 즐거운 나들이만 했다는 후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 행복했으면 그저 잘 산 것이다.
5월 내리 놀고먹기만 하다가 무릇 위기감이 샘솟아서 오늘부터 다시 할 일들을 시작했다. 집에 있으면 생산성이 바닥을 찍고 내리 노는 편이라 뭐든 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하여, 의지를 다지며 카공을 하러 나갔다. 미루고 미루던 일들을 꽤 많이 해치우고 올 수 있었다. 새로 오는 주부터는 이제 과제 페이퍼도 쓰기 시작해야 하고, 연구도 다시금 공장을 가동해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
그래도 종강하고 몇 주 충만하게 잘 쉬었더니 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학 중에도 할 것들은 하면서도 푹 잘 쉬면서 충전을 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