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한 달 한국에 머무는 동안 너무나 잘 먹고 잘 쉬어서 떠나려니 섭섭하다. 가족들과 오랜 친구들도 보고,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내다 떠나려니 발길이 안 떨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산해진미와 익숙하고 편한 고향을 떠나 외로운 이방인의 길을 가는가 하는 약간의 현타도 함께 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 한국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담아보았다.
대학 동기 오빠의 청첩장 모임이었다. 미국에서 내내 먹어보고 싶었던 마라엽떡과 각종 해산물, 치킨, 요아정까지 시켜줘서 행복했다. 스무 살 때부터 징하게 모여서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이상한 짓은 다 같이한 친구들이라 각별하다.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위치를 어떻게들 알아서 잘 찾아갔는지, 참 보고 있자면 뿌듯할 따름이다. 다들 잘 지내라, 블로그들 좀 많이 하고!
남편과 먹은 동네 분식집 떡튀순, 역시 클래식은 영원하다. 남편이랑 연애할 때부터 분식은 참 자주 먹었는데 오랜만에 집 앞 분식집에서 떡튀순 세트를 먹으니 기분이 새롭다. 본디 분식집은 단짝의 상징인 인법. 의지할 곳 없는 미국에서 아주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왔다.
엄마 아빠랑 비 오는 날 막걸리집 가서 전과 문어숙회에 막걸리, 백세주 샘플러를 맛보고 왔다. 술이 워낙 몸에 안 받는지라 거의 안 마시다시피 하는데, 그나마 제일 좋아하는 술이 달달한 막걸리다. 네 가지 맛 다 너무 맛있었다. 막걸리가 얼마 만이었는지! 술도 안 좋아하지만 미국에 돌아가면 비 오는 날 제법 그리울 것 같다.
거의 나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온 가족 다 같이 먹은 양념 갈비. 영롱하다.
역시나 친정 찬스로 라세느에서 저녁 뷔페를 먹고 왔다. 어째 제일 맛있는 것은 다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다. 미국 시골 대학타운에서 죽어가던 미각세포만 잔뜩 깨워가지고 돌아가니 말이다.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길거리표 떡볶이도 먹어주었다. 역시 혼자 서서 먹어야 제맛인 길거리 떡볶이다. 아, 역시 클래식은 영원하다.
출국 직전, 지볶이가 사준 삼겹살, 가브리살, 항정살이다. 연구실서 맨날천날 부여잡고 같이 울던 애가 이제 전문가 따고 돈도 잘 번다고 고기도 사주고 선물까지 챙겨줬다. 감개가 무량하다! 지볶이 다니는 으리으리한 새 직장도 구경하고, 카페가 닫아서 쫓겨날 때까지 수다도 떨었다. 가난한 유학생 잘 먹여주고 챙겨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어디까지 성공할 셈인지 아주 단단히 응원하며 지켜보도록 하겠다.
집 앞 파리크라상도 여러 번 갔다. 소금 빵이 무슨 맛인지 궁금했는데 진짜 맛있다. 첫 입에 그냥 버터 풍미가 그득하고, 텍스처는 쫜-득하니 예술이었다. 한 마디로 미국에는 절대 없을 맛이었다. 이날 먹고 너무 맛있어서 두어 번 더 사 먹었다. 한국 조리빵은 진짜 섬세하고 맛있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맛있는 것은 한식이다. 열심히도 먹으러 다녔다. 왼쪽은 포두부쌈, 오른쪽은 고등어구이와 알탕이다. 한식을 많이 먹고 와서 진짜 행복했다. 버거와 피자에 죽어가던 미각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돌아가는 마당에 이 미각세포들이 다 깨어나서 어쩌나 걱정이다.
먹기도 정말 잘 먹고, 타지에서 고생한답시고 가족들과 오랜 친구들에게 응원과 위로도 아낌없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더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은 아랑곳 않고 출국 날은 도래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려 조금은 고된 출국길이었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데, 돌아가는 길은 매우 험난한 여정이다. 인천에서 샌프란까지 11시간, 샌프란 공항에서 10시간 후 환승, 그리고 샌프란에서 밤 11시 비행기로 인디애나폴리스까지 4시간, 도착 예정 시간은 새벽 6시였다. 마지막으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블루밍턴까지 버스로 1시간 30분까지...! 대략 30시간의 대이동이다.
유나이티드 항공 기내식을 먹어본 이후부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유나이티드 기내식 진짜...... 말잇못이다. 특히 오른쪽에 나온 저 아침식사의 샌드위치는 빵 식감이 종이 같아서 반도 못 먹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빵이 바짝 말라서 서걱-서걱-하니 종이를 베어 무는 것 같았다. 한국 국적기들이 진짜 기내식이 맛있는 편이구나 깨달았다.
충격적이던 기내식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비행을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 편이라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무난하게 잘 왔다. 고백하자면, 유나이티드 개인 스크린에 장착된 게임에 중독돼서 게임에 엄청 몰두하다 보니 11시간 비행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왔다는 것......!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를 하다가 그 유명한 세컨더리 룸에 다녀왔다. 다행히 금방 풀려났다(?). 모쪼록 잠시 마음고생을 하고, 10시간 경유 시간을 버텨야 하므로 풀려나자마자 셔틀이 있는 호텔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했다. 한국으로는 새벽 시간인지라, 호텔 가자마자 푹 자고 일어나서 샤워도 싹 하고, 옷도 갈아입고 두 번째 비행을 위해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두 번째 비행 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남편과 저녁을 먹었다. 남편은 고기가 잔뜩 들어간 미국식 부리또를, 나는 미역이 잔뜩 들어간 튀김 우동을 먹었다. 여기서도 입맛 취향이 여실히 드러난다. 남편은 아마도 전생에 미국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국내선은 기내식이 따로 없기 때문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두 번째 비행에 올랐다.
밤 11시에 탑승한 밤 비행기는 나름 낭만이 있었다.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다만, 이때부터는 긴 이동시간에 지쳐서 조금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경유 시간을 수면으로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군다나 여러 시간대를 넘나들다 보니 시차 적응도 안 되어서 피로가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새벽 6시, 인디애나에 도착했다. 해가 한창 뜨고 있어 장관이었다. 남편과 나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꽤나 심하게 피로했다. 인천을 떠나 이동한 지 어언 25시간째였다.
인디폴에서 블루밍턴까지 가는 버스가 2시간 남짓 후에 첫차가 있어서 공항에서 아침을 먹고 시간을 조금 때웠다. 태블릿으로 빌린 이메일도 처리하고, 고잉 세븐틴을 한 편 때리니 시간이 딱 맞게 지났다. 역시, 세븐틴은 삶의 낙이다.
블루밍턴으로 가는 길. 광활한 옥수수밭이 익숙하다. 인디애나에 오긴 왔구나 생각하며 약 1시간 남짓 더 달려 블루밍턴에 도달했다. 와, 정말 길고도 고단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총 30시간 남짓 걸린 이동이었다.
블루밍턴 집에 도착했다. 30시간 여정을 소화한 것에다 시차까지 있어 컨디션이 안 좋았다. 한동안 거의 신생아처럼 잠만 잤다. 유학생의 시차 적응 꿀팁 하나- 한국의 밤 시간에도 자고, 미국의 밤 시간에도 자서 약 20시간 정도 자고 미국 시간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적응이 웬만큼 된다. 단점은 지남력을 잃고, 날짜가 훌쩍 지나있음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된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며칠을 이동과 시차 어택으로 훌쩍 보내고, 비로소 남편과 정신을 차리고 첫 외출을 했다. 텅텅 빈 냉장고도 다시금 채우고, 밀린 일들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 달여 만에 집 우편함도 체크하니 중요한 우편들이 많이 와있다.
8월에 있을 박사 동기의 결혼식 청첩장이 도착해 있다. 미국인 결혼식은 처음인지라, 뭘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공부할 게 한 둘이 아니다. 한국 결혼식은 빠삭해서 하객룩은 눈 감고도 찾아 입는데, 미국 문화에 사는 영 생소하다. 드레스 코드도 정해주는데, 꽤나 격식을 차려야 해서 드레스도 새로 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모쪼록 처음 가보게 될 미국 결혼식도 기대가 되고, 또 동기의 결혼을 축하해 줄 수도 있어 뜻깊은 경험이 될 듯하다.
어쩌다 보니 내년에 결혼하는 또 다른 동기의 결혼식에는 Bridesmaid도 하게 되었다. 하여, 이번 여름에 미국인들의 결혼식을 눈여겨보고 많이 배우고 와야겠다. 아직 조금 남은 여름 방학도 꽤나 다채로울 예정이다.
또 다른 우편으로 심리 상담 보험 연장 관련 서류가 와있었다. 연간 35불만 내면 사건 사고 시 건당 100만불을 보상해 주는 보험이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시스템인데 볼 때마다 감탄하는 그런 보험 상품이다. 물론 아무 사고가 없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어쨌든 리스크가 있는 직종이다 보니 보험 들어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잊지 말고 부지런히 연장해야겠다.
막상 오기 전에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막상 오니 또 미국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것들과 배워가는 것들도 눈에 들어온다. 결국 이런 부분 때문에 익숙함과 잠시 결별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젊어서 고생 사서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앞으로도 사서하는 고생담을 계속해서 연재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