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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Oct 03. 2019

항상 거기에 있어줄 수 있나요?

상실이 주는 불안에 대하여


"오늘 그 식당 못 가서 너무 아쉬워"

"앞으로 갈 날 많은데 뭐가 아쉬워"

"나는 그걸 잘 모르겠어. 오빠는 미래에서 온 사람 같아"

" ??? "



     가기로 약속했던 식당이 있었는데, 몸이 아파 데이트를 쉬게 되었다. 나는 무척이나 아쉬워했고, 남자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 또 갈 날이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내일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다. 그게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회의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당연시하고 기대하는 내일이 반드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는 보다 실존적인 의미에서다. 관계에서의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어본 탓이다.



     가장 크게는 주양육자(primary caregiver) 중 한 명이었을 할머니와의 사별이 주효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시던 할머니였고, 나의 거의 모든 성장 과정을 함께 했었던 분이셨다. 어린 시절 몇 없는 기억 속에 꼭 등장하는 그런 존재다. 태어난 순간부터 교복을 입던 날을 거쳐 대학에 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늘 그냥 그렇게 존재할 줄만 알았던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폐결핵에 걸려 입원을 하느라 갑작스레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격리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해는 했겠지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맞는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잠깐 떨어져 있다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할머니는 그 길로 꽤 오랜 시간 입원 생활을 하셨다. 하루는 문득 그런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퇴근 후에 병문안을 가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던 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퇴근을 하고 보니 몸이 너무 피로해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냥 쉬었다. 그리고 그 주에, 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 임종도 보지 못한 채로.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있었을 기회를 다음으로 미뤄버린 순간, 그 기회는 소멸되어 버렸다, 영원 속으로. 그게 그렇게도 충격적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당연한 내일은 없구나 하고.






 

     그런 상실로 시작된 나의 20대 초반이었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시작이었다. 연애를 통해 새로운 애착 대상을 한창 경험할 시기에 애석하게도 내가 겪었던 것은 잠수 이별, 전화 통보 이별 등 영문도 모를 갑작스러운 헤어짐이었다.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누구든 내 곁을 이유와 맥락을 불문하고 언제든 떠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든, 혹은 마음이 떠버리는 관계의 문제든 간에 말이다.



     나는 아직도 그걸로 많이 힘들어하곤 한다. 덩달아 남자 친구도 함께 힘들어진다. 나는 행여나 남자 친구가 없어질까 봐 자주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사실 쌓아온 관계가 있어 마음이 뜰 거라고는 의심치 않는다. 다만 존재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은 때가 종종 있다, 할머니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디 안 가요. 마음으로 늘 옆에 있잖아요'를 골백 번도 더 말해주곤 한다. 차분하고 확신에 찬 그의 말과 따스한 목소리를 들을 때면 조금 안심이 되곤 한다. 하지만 굳게 자리 잡은 생각과 불안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어 반복적으로 자꾸 튀어나오곤 한다.



    사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고 싶기도 하다. 마음으로 함께하는 것이 실제로 우리가 앞으로도 쭉 함께 실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맞냐고. 그럼 할머니는 왜 갑자기 그렇게 갔냐고, 우리라고 내일이 반드시 있고, 함께할 수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사실 이 물음들을 차치하고 똑바로 말하자면, 그냥 어디에도 가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소망인지 안다. 할머니도 나를 아프게 하고 싶어서, 내 곁에 있고 싶지 않아서 돌아가신 것도 아닐 테고, 갑작스레 떠났던 인연들도 각자의 말 못 할 사정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어주길 바라고, 그 바람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불안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일은 다 벌어질 테고, 그것을 예측하거나 통제하려고 하기를 멈추고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내일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오늘에 충실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더 지혜로 것이라는 결론이다. 물론 잘 안되고 어렵겠지만.







    그동안 경험했던 삶의 이력들로 인해 굳어진 생각이 현재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분명 유감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새로운 경험들이 과거의 불안에 익숙해진 뇌를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업데이트해줄 수 있다는 것이 현대 심리학의 핵심이자 희망임을 잘 안다. 때문에 아직까지 내일의 내 삶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나이지만, 꾸준히 새로 경험하고 있는 오늘들이 새로운 관점과 안정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도와주고 있음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때때로, 혹은 자주 이해되지 않았을 나와 함께하며 이해되지 않은 채로도 투닥투닥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띄우며 마무리해 본다.


  

꽉 잡고 있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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