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를 마친 남자 친구의 소감이자 한줄평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 어이구 힘들었구나. 이 날의 데이트는 여느 날 함께 보낸 시간보다 퍽 짧았다. 다만, 평소보다 감정이 조금 더 많이 오고 갔다는 차이가 있었다. 긴 하루였고, 다사다난했다는 말속에 그의 힘겨움이 전해져 왔다. 복잡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들었다. 갈등을 잘 견뎌주고 노력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늘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솔직하게 감정을 다 표현하는 것과,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굉장히 어렵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오가고 갈등이 생겨날 때에는 누구나 그 상황을 덮거나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여전히 이런 상황은 힘들고 어렵지만, 심리를 전공하고 집단 상담을 거듭해보면서 꽤나 익숙해졌다. 게다가 표현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기에 직면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예의바름과 적정선을 지키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부정적인 표현이 생경하고, 거부감도 크고 쉽지 않을 퀘스트였을 것이다.
어려울 것은 잘 알지만 남자 친구와 누구보다도 진솔하고 가까운 사이이고 싶었다. 관계가 깊게 무르익고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솔직한 감정을 나누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외면하거나 옆으로 치워버린 불편한 감정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그만큼의 정서적인 거리감과 벽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설명하자 남자 친구도 이해를 하고, 어렵지만 노력해보겠다고 했던 것 같다.
이 날 만남에서는, 늘 그렇듯 나의 서운함이 도화선이 되었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들에 대해 나는 속상해하고 아쉬워하는데, 그 감정이 종종 크게 터지곤 한다. 이 날 남자 친구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서운해하는 게 부담으로 느껴진다고도 했다. 덧붙여 지난주에는 그도 힘든 한 주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고려해 가며 이야기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남자 친구가 문을 열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의 솔직함에 놀라기도 하고, 부담이라는 말에는 섭섭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속마음을 듣게 되어 반가웠다. 듣지 않았다면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지 몰랐을 일이다 - 겉으로 티가 잘 안나는 편이기에 더 그렇다. 힘겨워할 줄도 모르고 마음 놓고 내 얘기만 세게 했던 걸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렵지만 과감하게 내디뎌준 발걸음이 너무 예뻐 보였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게 익숙지 않고 어려웠다는 것과 더불어, 얘기해 보니 좋았다며 앞으로도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남자 친구의 말이 믿음직스러웠다. 함께 노력해보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대화로 말미암아 펼쳐지는 깊고 다채로운 관계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 마음은 정말 넓고도 깊은 바다 같아서, 마음먹고 스킨스쿠버 하듯 깊게 들어가 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다 안다고 느꼈던 나의 사람에게 얼마나 더 깊은 내면이 있는지 모른다.
깊은 속을 꺼내어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거리감이나 장벽 없이 마음과 마음이 맞닿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겪어도 말로써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음을 믿는다. 그렇게 함께 걸어 나가자고 내미는 손을 든든히 잡아주면 좋겠다, 지금처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