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꽃으로 다시 핀 천사들 ~
축제장까지 가지 않아도 집을 나서면 곳곳에 벚꽃이 만발한 지난봄이었다.
퇴직한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개를 아느냐?”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옛날 제자라면서 나를 찾는다고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나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확인하고 허락을 받아야 내 연락처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섬광처럼 기억을 스치는 이름 경희였다. 저 멀리 30여 년 전에서 지금 바로 눈앞에 까지 오는데 한 순간이었다.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연락처를 알려주라고 허락을 했다.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30여 년 전 초임 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했던 제자였다. 또래에 비해 좀 어른스럽고 속이 깊고 알뜰했던 아이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을 누나처럼 야단도 치고 다독거려주던 아이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경희의 마지막 날 모습에서 항상 콧날이 시큰해지곤 했다.
대부분의 학교가 강당이 없어서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하던 시절이었다. 2월이지만 아직 겨울 끝자락의 추위에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졸업식을 했다. 얽매임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아이들은 신이 나서 더 떠들었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쏟고 가르쳤던 아이들이 아무 아쉬움도 없이, 떠나는 것에 마냥 신이 나니 내심 서운하고 허탈했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초임 학교여서 나도 순수한 열정이 있었나 보다. 해가 거듭할수록 졸업식이 나에게도 그리 서운한 날이 아니었으니까.
그날 마지막 순서로 아이들을 인솔해서 교문까지 배웅을 할 때였다. 이제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더 많은 공부에 시달려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잘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해맑은 얼굴로 신나게 떠들수록 내 가슴속은 속울음이 차올랐다. 줄을 서서 교문을 향해 가기 시작할 때였다. 경희가 울기 시작했다. 교문이 가까워질수록 경희는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떠들던 개구쟁이들까지도 숙연해지게 했다. 어쩜 내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이었을까. 뭔가 목울대까지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참느라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난 빈 교실. 혼자서 텅 빈 운동장을 내다보며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말없이 엉엉 울던 경희를 눈앞에서 보며 함께 부둥켜안고 우는 심정이었다.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나의 자취방에 아이들이 몇 번 와서 놀다가곤 했다. 함께 자취를 하던 유치원 교사였던 여동생도 아이들이 오면 다과도 차리고 손 놀이 게임도 하면서 좋아했다. 그때도 경희는 동생을 돌보느라 한 번도 오지 못했다.
그해에 나도 전근이 되어 학교를 떠났다.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컴퓨터 인터넷이 나오기 전이라 그들과 소식이 끊어졌다. 4년마다 정기전보로 학교를 옮겨 다니고, 결혼도 하고, 살기에 정신없이 바빴다.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때 아이들도 세월 속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경희로부터 시작된 연락이 제자들끼리 연락을 주고받아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30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자기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반신반의했다. 이름을 말하면서 자기를 기억하는지 확인을 했다. 참 신기했다. 이제 내가 내 기억력을 못 믿을 정도로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나도 30년 전의 그들을 잊고 있은 줄 알았는데 이름을 대면 생생하게 그들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단기 기억은 점차 약해져 가도 장기기억은 살아있게 한 하나님의 섭리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가 자기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들도 의욕이 생겼나 보다. 일단 모이자, 만나자로 뜻이 모아졌다. 전국에 흩어져 있기에 내가 있는 서울에서 만나기로 합의를 봤다. 당일에 만나고 헤어져야 하기에 오고 가기 편리한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반가운 마음에 덥석 허락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20대 한창 젊을 때에 만났는데 내 나이 이제 예순을 바라보니 그들에게 너무 초라하고 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거울을 보니 잔주름이 흐르는 얼굴과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다른 때보다 더 뚜렷해 보였다. 차라리 그리움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은 추억이라도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여기저기 교육청과 학교를 몇 단계나 거쳐 수소문해서 나를 찾은 그들의 마음이 또한 그지없이 고마웠다. 세월의 길이만큼 그리움의 정도 깊었다.
약속한 날이 왔다. 이런저런 망설임을 접고 만사 제쳐두고 서울역으로 갔다. 일요일 오전 10시. 만남의 장소 대합실로 갔다. 기차에서 막 내렸다는 문자를 받고 ‘나오는 곳’에서 만난 진숙이, 우리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찢어진 청바지에 하이힐을 신은 멋쟁이, 초등학교 때 이미지 그대로였다. 말이 없었던 민재는 여전히 묵직했다. 큰 꽃다발을 안고 나타난 미숙이도 여전히 예전 모습에 살만 더 찐 후덕한 40대 아줌마였다. 시험에서 하나만 틀려도 애가 타서 눈물을 흘리던 광수, 바른생활 사나이 수찬이, 또래에 비해 성숙했던 미남 은규, 초등생인데 방과 후에도 남아서 시험공부하던 노력파 동민이,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는 은경이, 경숙이……등등 내 기억 속의 아이들이 그대로 내 앞에 와서 앉아 있는 듯했다. 연락의 시초였던 경희는 사업차 미국 방문 중이어서 불참이었다. 30여 년 전, 그들은 열두세 살이었고,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이제 제자들은 40대 가장들이 되어서 만났다. 그들 모두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 이건만 우리는 금방 30 년 전 6학년 담임과 아이들로 돌아가 거리낌 없이 만나고 있었다.
나의 거주지로 모였고 내가 담임이니 내가 가이드가 되기로 했다. 서울역에서도 가깝고 내가 좋아한다고 남산으로 안내를 했다. 벚꽃 잎이 눈처럼 휘날리며 우리의 재회를 축하해 주었다. 나이로 봐서 내가 제일 뒤처질 줄 알았는데 그들도 숨차고 헉헉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같이 늙어간다고 핀잔을 주었다. 자식들 키우랴, 직장 생활하랴, 한창 바삐 사는 때라 운동 부족이라고 아우성이었다.
남산에서 점심을 먹고 자리를 옮긴 야외 벤치는 30 년 전 6학년 교실을 옮겨놓은 듯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그램을 하듯 서로 떠오르는 기억을 풀어놓으며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소란스러운 웃음의 도가니에 빠졌다. 무심코 한 말들도 그들에겐 정말 큰 의미를 남겼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랐다. 공부 못하는 자기를 보고 키 크고 예쁘니까 슈퍼모델이 될 거라고 해서 그 자신감으로 지금 에어로빅 강사가 된 것 같다는 진숙이. 그때 구박이나 했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했다.
친구랑 다투고, 달래도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동민이는 그때 선생님이 역시 0 씨 고집이라고 해서 조상들에게 욕을 돌린 것 때문에 울음을 더 그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제라도 눈물의 의미를 알았으니, 뒤늦게나마 0 씨 모두에게 사죄한다고 했더니, 역시 0 씨는 30년이 지나도 사과를 받아내는 고집이라고 놀리며 다시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아무튼 우리는 그날 나이를 잊어버렸다. 30 년 전 담임과 아이들로 돌아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빛바랜 앨범을 넘겨보듯 지난 추억을 떠올리기에 바빴다.
나는 그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고, 그들은 선생님 말씀에 더 잘 따르지 못했던 것을 미안해했다. 30 년의 세월 동안 서로에게 서운했던 것까지도 어우러져서 모든 것이 좋은 추억으로 발효되었나 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우리는 만나는 순간 그냥 6학년 담임과 제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30 년 만의 재회!
죽은 줄 알았는데 봄이면 다시 피는 봄꽃이었다. 걱정했던 주름진 내 얼굴도 활짝 웃게 한 봄꽃이었다. 잊지 않고 나를 찾아준 그들 역시 내 마음속에 다시 핀 화사한 봄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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