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친정오빠랑 올케언니가 한국에 왔다. 이민 간 오빠와 올케언니가 함께 한국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오빠는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명예퇴직을 했고, 언니는 간호사로 정년퇴직을 해서 함께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캐나다에서 연금을 받으며 지금의 안정된 노후를 누리기까지, 이역만리 타향에서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생각만 해도 가슴 저미는 일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다는 1960년대. 오빠는 시골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형편이었다. 그래도 오빠는 먹고 살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다. 고학을 하며 중학교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사육장 관리를 책임지고 한다는 조건으로 무료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영어에 흥미를 느끼면서 유학에 대한 꿈도 키웠다. 영어 선생님이 소개해준 영어 구문론이라는 책을 꼭 갖고 싶었다. 그 영어책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점심을 굶으며 기숙사 식권을 모았다. 어쩌다 닭장에서 나오는 깨진 계란 한 개가 오빠의 밥이 되기도 했다. 오빠는 책을 사고 싶은 일념에 한 달 동안 모은 식권을 행정실로 가서 돈으로 교환해달라고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무료 기숙사 혜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간 모은 식권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훔치며 행정실을 나오는 모습을 본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영어책을 갖게 되었다. 정말 책을 씹어 먹듯 공부했다. 책의 쪽수만 말하면 영어문장을 줄줄 외울 정도로 공부를 했다.
결국 오빠는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오빠는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이 혼자 맨손으로 시작한 유학 공부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에서 받은 수입에서 일정 금액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한국으로 송금을 했다. 7남매 맏이이고 유일한 아들이었던 오빠는 가장처럼 책임감이 강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오빠와 언니가 겹쳐 보일 때가 많았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속울음이 차올라오곤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오빠에게 하늘이 내려준 수호천사가 나타났다. 간호사인 올케언니였다. 오빠가 박사과정을 하고. 안정적인 교직을 갖기까지 올케 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언니는 가정살림과 직장생활에 쫓겨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못했다. 밤늦게 퇴근해서 저녁을 먹으면 쓰러지듯 바로 자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런 생활의 반복으로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병을 얻었다. 지금도 올케언니는 잠을 누워서 자지 못하고 앉아서 자야 한다. 오빠에게 수호천사이면 우리 가족에게도 올케언니는 수호천사였다. 그런 오빠 언니가 한국에 왔으니 우리 친정 가족들은 모두가 진심으로 지극정성으로 대접을 하고 싶어 했다.
오빠 언니의 일정에 따라 우리 집 방문도 날짜가 잡혔다. 날짜를 받고부터 무엇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마지못해 하는 부담스러운 대접이 아니었다. ‘뭔들 못하랴’라며 발 벗고 나서서 자원하는 마음이었다. 오빠와 언니는 여기저기, 친척 친구들과의 만남이 줄을 잇는 일정이었다. 나는 가급적 음식이 중복되지 않게 하려고 가끔 오빠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무엇을 드셨는지도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몇십 년 만에 고국에 왔으니 일단 한식이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정했다. 다음으로는 핵심 메뉴를 골라야 했다. 깨진 계란 하나로 허기를 달래던 오빠가 생각났다. 그것을 몇 배로 채워주고 싶어 졌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외국 유학을 가는데도 닭도 한 마리 잡아주지 못하고 그냥 김포공항에서 만나서 보냈다고 늘 아쉬워하던 친정엄마의 말도 생각났다.
‘그래 바로 그거다.’ 삼계탕이었다. 어려운 문제의 정답을 찾은 듯 혼자서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직장에서 퇴근해서 내가 혼자서 하기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직장생활 핑계로 유명 맛 집으로 모실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평생에 오빠 언니를 위해 차리는 처음 밥상이었다. 또다시 캐나다로 돌아가야 하니 어쩌면 마지막 밥상이 될 수도 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다. 꽁꽁 얼어붙는 한파가 이어지고 있어서 시장을 미리 봐 둘 수 있었다. 날짜별로 할 일을 메모했다. 매일매일 메모장을 보며 체크를 해나갔다.
우리 집 방문 1주일 전, 주말에 남편과 서울에서 이름 난 전통시장에 가서 바리바리 장을 봐 왔다. 인삼, 황기, 통마늘, 대추, 생강, 대파, 찹쌀을 준비했다. 반찬으로는 김장으로 한 배추김치, 알타리김치가 있지만 삼계탕에는 깍두기가 꼭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주말에 남편이랑 무 두 개로 새로 깍두기를 했다. 미리 해 두어야 맛이 들 것 같았다.
하루 전에는 퇴근길에 후식 과일을 사 왔다. 배와 곶감을 샀다.
당일 아침, 찹쌀을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출근을 했다. 퇴근하면서는 대형마트에 들려서 마지막으로 영계와 전복만 사서 곧장 집으로 왔다.
혹시나 실수할까 봐 요리 자격증이라도 따듯이 인터넷에 나오는 레시피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미리 손질해둔 재료들을 조리대 앞에 진열했다. 오빠와 언니를 눈앞에 그리며 요리를 시작했다.
닭의 꽁지에 붙은 삼각형 모양의 기름덩이를 제거했다. 뱃속의 내장과 기름기도 최대한 떼어 냈다.
영계 뱃속에 재료들을 하나하나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오빠의 가난과 배고픔의 세월을 헤아려보며 불린 찹쌀을 넣었다. 먹는 것이 넘치는 요즈음에 배고픔이라는 말이 전설처럼 느껴져 더 가슴이 아렸다. 힘겨웠던 지난 세월과 먼 길 오느라 쌓인 피로를 풀어주려는 마음을 뿌리 깊이 심어 머리 부분을 잘라낸 인삼을 넣었다.
추운 겨울이라 감기 걸리지 말라고 우리나라 슈퍼 푸드인 마늘도 넣었다. 시차 적응하고 잠자리가 바뀌어 힘들 것을 생각하며 신경안정제 성분이 들었다는 붉은 대추도 넣었다. 제철은 아니지만 구수한 맛과 소화를 도와주는 밤도 빼놓을 수 없었다. 가을에 얻어둔 은행 알도 프라이 팬에 달달 볶아서 몇 개 넣었다.
그동안 일일이 다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 두었던 크고 작은 고마움의 조각들을 모아서 닭의 배를 채워갔다. 닭은 배가 통통하도록 꽉 찼다.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주의해야 할 과정이 남아 있었다. 속이 터지지 않게 묶는 것이었다.
닭다리 안쪽으로 칼집을 내어 다리를 엇갈리게 꼬아서 고정시켰다. 찢어질까 봐 심혈을 기울이며 조심했다. 한 마리 한 마리 완성될 때마다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가마솥에라도 끓이고 싶었지만 아파트 사정상 마음뿐이었다. 큰 압력 밥솥에 닭을 넣고 물을 부은 후 남은 재료들인 인삼, 황기, 대추, 통마늘, 대파, 생강, 청주를 모두 넣었다.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오빠 언니에게 보약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시골에 계신 친정엄마의 마음도 넣었다. 늘 고생하는 오빠 언니를 그리며 낯설고 물선 이국만리까지 마음이 맞닿아 있던 엄마였다. 90 노모가 되어 이제 밥을 해줄 수도 없는 친정엄마의 진심까지 넣었다.
오빠와 언니가 우리 집에 오시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리였다.
드디어 가스에 불을 붙였다. 얼마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압력밥솥 추가 바쁘게 돌기 시작했다. 불을 줄였다.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푹 고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삼계탕이 고아지는 동안 상에 차릴 반찬들을 챙겼다. 배추김치, 알타리김치, 깍두기, 오이, 풋고추, 된장, 고추장을 챙겼다. 오빠와 언니의 입맛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다진 파와 소금과 후추를 곁들였다. 된장 고추장까지 등장하니 정말 한식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삼계탕이 푹 고아지면서 온 집안이 삼계탕의 구수한 맛과 열기로 가득 찼다. 불을 끄고 김이 빠질 때까지 뜸을 들이기로 했다. 환기를 시키느라 창문을 열면 집이 춥고, 문을 닫으면 온 집안이 삼계탕 냄새로 진동을 하니 창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지하철역에 마중을 나갔던 남편이 집 앞에 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김을 뺀 압력밥솥을 열고 다시 불을 붙였다. 반가움으로 가슴 설렘처럼 삼계탕이 다시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손질해둔 전복을 넣었다. 원기를 회복해주고 소화를 잘 시켜 줄 것을 전복에게 부탁하며 마무리를 했다.
초인종이 울리고 남편이 오빠와 언니를 모시고 들어왔다. 옷에 묻은 찬바람까지 감싸 안으며 우리는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오빠는 중간에 방학 때에 한국에 온 적이 있지만 올케언니는 처음으로 대면한 날이었다. 역시 가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우리를 금방 하나로 엮어주었다.
오빠와 언니는, 직장에서 돌아와서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 나를 보고 너무 폐를 끼친다고 황송해했다. 그냥 식당에서 사 먹어도 되는데 번거롭게 집에서 준비한다고 안쓰러워했다.
전복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인 삼계탕의 불을 껐다. 시어머니께서 하던 것이 생각나서 국물 위로 뜨는 기름을 거두어 냈다. 대파, 생강도 건져냈다. 삼계탕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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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고국에 온 정취를 살리려고 질그릇 뚝배기에 삼계탕을 담아냈다. 마음과 정성도 꾹꾹 눌려 담았다. 친정엄마가 끓여주지 못해 애태웠던 삼계탕이라고 말했다. 엄마의 마음까지 녹아있는 삼계탕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두 분이 다 이제 나이가 있어서 음식을 그렇게 많이 못 잡수신다고 했다. 그런데도 드시면서 몇 번이고 맛있다고 좋아했다. 다행히 몸집이 작은 영계여서 양이 부담을 주지 않고 적당했다. 살이 부드럽고 맛도 좋다고 극찬을 하셨다. 압력밥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드셔서인지 국물까지 깨끗이 비워주셨다. 오빠 언니가 보약을 한 그릇 드신 것처럼 내 마음이 놓이고 뿌듯했다.
자리를 옮겨 거실 탁자에 후식을 차렸다. 배와 곶감, 한과, 매실차를 차렸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이민생활, 영어공부, 캐나다 문화, 건강정보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며칠 후 기약 없이 아쉬운 작별을 했다. 지난주엔 오빠가 캐나다에서 한인들을 위한 영어책을 출간해서 보내왔다. 아직도 삼계탕의 온기가 식지 않고 책에 스며있는 듯했다.
오빠 언니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준 삼계탕, 허기진 향수를 달래준 삼계탕, 나의 정성을 우려낸 삼계탕, 친정엄마의 소원까지 이루어준 삼계탕이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보글보글 끓던 삼계탕처럼 오빠 언니의 건강을 비는 마음이 끓어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