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 첫 경험

~ 글을 쓰는 행복을 선물해준 천사 선생님 ~

by 강신옥

‘첫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첫사랑’을 잘 잊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처음’이라는 말이 주는 역사적 의미와 새뜻한 설렘이 평생 여진처럼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의 ‘첫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림일기 쓰기부터 6학년 때의 생활일기 쓰기까지 글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의 검사나 숙제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주체가 되어 글쓰기를 한 것의 첫 경험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듯, 5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날, 글쓰기의 첫 경험은 아직도 내 기억 속을 맴돌고 있다. 못 쓰는 글이지만, 누가 꼭 읽어주지 않아도 나에게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글쓰기 첫 경험의 온기가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4학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취미를 중심으로 한 클럽활동 시간이 있었다. 컴퓨터가 나오기 전이라 주산이 대세였다. 주산을 잘하면 수학(그 시절에는 산수라고 함)을 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학 공부를 잘하기 위해 4학년 때부터 나는 무조건 주산 반을 했다.



6학년 때도 여전히 주산 반이었다. 암산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꼭 수학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주산 반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한 시간 내내 숫자를 부르고 암산하는 것이 지겨웠다. 나의 하소연을 들은 단짝 친구가 문예반에 같이 가자고 했다. 문예반은 글짓기를 하는 곳인데 동화책을 읽고 끝날 때도 많다고 자랑했다. 동화책이라는 말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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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주산 반에서 문예반으로 바꾸었다. 동화책을 읽을 기대에 부풀어서 간 문예반 첫날, 우리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문예반 선생님은 칠판에 글짓기 제목을 몇 개 써 주셨다. 글짓기를 다한 사람은 선생님께 검사를 받고 나서 동화책을 읽어도 좋다고 하셨다.



친구의 소개와 달라서 실망을 했다. 아무튼 글을 쓰고 나면 동화책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막상 처음으로 글쓰기를 하려니 막막하고 부담이 되었다. 차라리 단순 노동 같은 계산을 하는 주산부가 속편 했다. 후회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칠판에 써진 제목을 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와 선생님의 눈이 마주쳤다.

“ 왜? 어려워? 너무 어려워 말고 일기 쓴다 생각하고 쓰면 돼.”라며 선생님이 웃으셨다. 수채화 물감이 물에 퍼져나가듯 선생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내 마음에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일기?’라는 말에 나름대로 자신이 생겼다. 강제로 썼든 어찌 되었든 6년 가까이 쓴 것이 일기였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칠판에 있는 것 중에 제목을 점심시간으로 정했다. 엄마가 아파서 도시락을 못 싸온 어느 날의 일을 썼다. 학교에서 집이 가까워서 점심시간에 집에 갔는데 엄마가 아픈 몸으로 일어나서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일을 썼다. 처음 시작은 어려웠지만 쓰다 보니 글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썼다. 글을 쓰는 순간 좀 전까지 들리던 운동장의 요란한 마이크 소리도,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도 다 멈춘 듯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글을 쓰고 나서야 다시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이 한 사람씩 검사를 하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에 검사받는 아이들이 대부분 다시 써오라는 지시를 받고 자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제발 퇴자를 받지 않길 빌며 가슴 졸였다. 짧은 몇 분이 참 길게 느껴졌다.



내 글을 다 읽으신 선생님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시며 공책 표지를 보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선생님 책상 곁에서 숨 죽이고 기다리던 나는 깜짝 놀라며 몸 둘 바를 몰랐다. 내 예상을 깨고 선생님은 대만족을 하셨다. 마음 졸이고 불안했던 크기만큼 희열을 느꼈다. 그날 선생님이 다섯 명을 뽑아서 학교 끝나고 다시 문예반으로 오라고 했다.



문예반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이셨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나이도 지긋하시고 털이 많아서 아이들이 털보 선생님이라 불렀다. 선생님은 방과 후에 우리를 모아놓고 앞으로 있을 행사를 소개하셨다. 한 달 후에 도내 글짓기 대회가 있는데 매일 연습을 해서 출전을 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글짓기를 잘하는 것에 대해 개념이 없었다. 차라리 집에나 빨리 가고 싶었다. 어떻게 쓰면 잘 쓰는지, 어떻게 쓰면 못쓰는지도 몰랐다. 그저 선생님이 제시하는 제목에 대해 내가 생각나는 일을 정말 일기 쓰듯 쓸 뿐이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수정을 하셔도 도대체 뭐가 정답인지 알 수도 없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문예반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때마침 가을운동회를 앞두고 매스게임 연습이 한창이었다. 5, 6학년 여학생들은 모두 오후 가을 햇살 아래에서 몇 시간씩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문예부 선생님의 건의로 우리들은 매스게임 연습이 면제되었다. 은근이 무슨 특권을 누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잘하든 못하든 문예반을 빠질 수가 없었다.



더구나 문예부 선생님은 늘 웃으시면서 우리를 대하셨다. 지금 기억으로 한 번도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생이 뭘 안다고 글을 지적하실 때도 기분을 상하지 않게 무척 조심스럽게 조언을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은 머리도 좋고 마음도 착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며 우리들에게 자부심까지 불어넣으셨다. 문예반에 가는 것이 점점 즐거워졌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셨다. 선생님이 동화책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선생님은 마음이 너그러우면서도 글쓰기에는 열정이 있었다. 항상 퇴근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글쓰기 지도를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선생님의 열정과 선한 마음이 나에게 글을 쓰는 기쁨과 행복의 씨앗을 심어 주었고, 글을 쓸 때의 느낌을 남겨 준 것 같다.



대회가 임박해서는 더 늦도록 우리에게 글쓰기를 시키셨다. 당시에는 교실에 전등이 없었다. 선생님은 해가 지면 우리들을 숙직실로 데리고 가서 전등을 켜놓고 글을 봐주시고 다시 쓰게 하셨다. 그때 나에게 글쓰기는 쉽고도 어려웠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 제목으로 나오면 어려웠다. 미흡한 글에도 선생님은 일단 칭찬부터 듬뿍 하고 나서 지적을 하시곤 했다. 약 한 달 뒤에 세 명을 선정해서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내보냈다. 나는 세 명 속에 끼여서 대회에 나가기는 했지만 한 달 사이에 없던 역량이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없어서 집에 부모님께는 대회 나간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실질적으로 글쓰기 실력이 늘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솔직히 세 명 속에 들어간 것도 부담이었다. 어떤 제목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결국 세 명 중에 한 친구가 대상을 받고 나는 가작에 그쳤다. 겨우 체면치레를 한 느낌이었지만 나에겐 그것도 감사하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세 명 중에 상을 받지 못한 한 친구가 울었다. 친구를 위로하며 가작이라도 받은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때 받은 큰 상장과 부상으로 받은 국어사전보다 나는 문예반 선생님의 기뻐하시던 모습과 아낌없던 칭찬이 더 큰 상이 었다. 내가 모르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지금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문예반 선생님의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글을 쓸 때 문득문득 눈에 선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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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문예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기도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의 글쓰기 첫 경험을 생각하면 짧은 한 달이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는지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다만 글보다 사람이었다. 역시 삶이 글이 된다는 명제를 확인시켜준 글쓰기의 첫 경험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첫 경험의 여운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회 수가 수 천에서 수 십 만이고, 구독자가 몇 백에서 몇 만인 작가님들은 정말 오랜세월 내공이 쌓인 글들을 쓴다. 글로 잔뼈가 굵어진 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고 존경을 보낸다. 나는 이제 고작 구독자가 100을 넘었고, 조회 수가 일만을 육박하고 있다. 매일 통계를 확인은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글쓰기의 첫 경험이 자란 열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나의 글쓰기의 첫 경험에서 선생님이 심어준 행복의 씨앗이 아직도 고스란히 살아서 내 속에서 열매로 자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아낌없는 리액션은 라이킷을 누르는 열매로 자랐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깊고 풍부한 글에 댓글을 쓴다는 것이 때로는 주제넘은 것 같아서 주춤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 글에 친절하게 칭찬의 별표(★)와 수정의 체크(∨)를 해주시던 선생님의 빨간 펜은 감동과 공감을 잠재우지 못하고 감히 댓글을 쓰는 열정의 열매로 자랐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교정에서도 전등을 밝히고 글을 쓰게 하셨던 것이 잠들기 전까지는 늘 무엇을 읽고 쓰는 열매로 자랐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의 글쓰기 ‘첫 경험’은 많은 구독자와 조회 수가 없어도 혼자 가슴 설레는 영원한 짝사랑의 열매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늘 읽고 쓰는 이 자체가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도 글을 쓰면서 그때의 ‘고요 속의 열정’이 주던 행복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도 글쓰기의 첫 경험이 살아있는 한, 생각은 늙지 않고 익어서 글로 열매 맺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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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 이미지 : Daum 글쓰기 이미지 ‖ ‖ 이미지 : https : // pixabay. 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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