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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26. 2020

절대 자유를 향하여

유영국의 미술읽기

work, oil on canvas, 130x194cm, 1964,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조각가 최종태는 「고인에게 바치는 편지」에서 유영국에 대하여 술회하기를 “세월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어떤 시대고 간에 꼭 있을만한 사람을 반드시 심어놓고 지나갑니다. 그 시대 그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역사는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선생님의 빈소에서 그 분의 영정을 바라보는데, 문득 ‘아, 한 시대가 마감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영국은 한국 추상 미술의 포문을 연 미술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동시대 활동한 미술가들에 비하여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그런데 왜 유영국은 후배 미술가들에게 ‘꼭 있을만한 사람’이라고 회고될까. 그리고 그의 미술은 왜 오늘날 미술 현장에 소환되는 것일까.



추상 미술의 태동

   유영국은 경성 고보 시절, 학급에서 문제 학생을 자신에게 보고 하라는 일본인 선생의 말을 듣고 이에 복종할 수 없어 학교를 자퇴했다. 그 후 그는 어업에 종사하는 그의 집안 분위기와 자유롭게 살고 싶은 그의 희망에 따라 항해사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자퇴 이력이 그 발목을 잡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떠난다. 당시 일본에서 서구의 미술을 접하였고, 그는 처음부터 추상 미술에 매료되어 그만의 조형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후 2년 뒤 그는 나무토막으로 화면을 구성한 릴리프 시리즈를 제작한다. 그리고 일본 미술협회가 주최한 제1회 <자유 미술가 협회전>에서 입선을 한다. 그는 같은 해 3월 릴리프 보다 앞선 유화 작품으로 제7회 <독립 미술가 협회전>에서 수상하여 데뷔를 하였으나, 수상한 작품인 ‘랩소디’도 기본 도형들을 중심으로 한 소위 말하는 추상 미술에 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추상 미술뿐만 아니라 구상 미술을 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유영국은 처음부터 추상의 길을 선택하여 점차 창작의 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사진기로 잠시 사진에 심취하여 사진학교를 다니기도 하였다. 그가 촬영한 사진들을 살펴보면 역시 피사체에서 간결하고 시원시원한 조형적인 요소들을 중심으로 하여 프레임 안에 담았다. 그의 미술은 그의 성품만큼 강직하게 발전하였다.  

work, 32x41cm, oil on canvas, 1964,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한국에 추상 미술을 꽃피우다

   한국에 귀국한 후 김환기의 소개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도안과 교수로 취임을 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다양한 미술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유영국은 생존을 위하여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생업을 위하여 부모님께 물려받은 양조장 지분으로 고향에서 양조업을 한다. 그는 피난민들에게 ‘망향’이라는 술을 만들어 팔아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전쟁 후, 잘 나가는 사업장을 뒤로하고 자신이 본업이라고 생각했던 미술가의 길로 되돌아온다. 당시 한국에는 화랑이라는 개념이 막 시작되기 시작할 만큼 미술계의 기본 생태계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그림을 사고파는 행위 역시 매우 드물게 이루어졌다.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을 1964년, 49세에 신문회관 특설 화랑에서 개최할 수 있었다. 그 후 2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통하여 그리고 각종 협회전을 통하여 꾸준히 신작을 선보였다. 심지어 유영국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자신의 그림을 못 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가 처음 그림을 판매하여 수익을 거둔 것도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최한 5회 개인전 이었다. 유영국이 추상 미술을 고집하고 또 묵묵히 개척해 온 조형 세계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심장병으로 투병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화려한 색감과 조형미를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한국의 자연과 미술

   유영국의 미술은 외형적으로 추상 미술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는 묘사하고자 하는 명확한 대상이 존재한다. 그가 묘사하는 대상은 주로 산과 자연이었다. 어린 시절 녹음이 푸르른 곳에서 자랐던 경험과 지속적으로 건강관리를 위하여 등산을 자주 하였던 만큼 그는 일생을 산과 자연과 함께하며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그는 후기로 갈수록 화려한 색감과 선과 면의 즐거운 리듬감으로 화면을 채워 간다. 유영국의 시선에서 관찰된 산과 자연은 우리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산과 자연이기에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늘 자유를 추구하는 그였기에 대상을 직접 묘사하는 미술을 지양하였고 대상이 지니고 있는 선과 면과 색채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어 그의 미술에 등장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감과 우직한 조형미로 감상자들에게 작품보다 커다란 에너지를 전해 준다. 이와 같은 그의 미감은 유영국만의 미술이며 그의 작품이 세월이 지나도 주목받는 힘이다.


work, oil on canvas, 105x105cm, 1999,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자유를 향하여 

  유영국은 한국 미술의 척박했던 시기에 오늘날과 같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실제로 많은 미술가들이 생계 문제로 그림을 지속할 수 없었으며 유영국에게도 역시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에 대한 굳센 신념과 의지로 다시 미술계로 돌아와 마지막까지 정신적인 자유를 꿈꾸며 그만의 조형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전위적인 그의 미술과 삶의 태도는 한국 미술의 현대화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유영국이 지향하던 자유의 크기만큼 자란 그의 미술 작품들은 그를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꼭 있을만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해 준 것이다. 


아침, oil on canvas, 100x73cm, 1958,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 원고는 월간 비자트 및 중기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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