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미술 읽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는 누구일까? 미술 대학이 생긴 직후에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의 수가 매우 적었을 때를 제외하고 미술대학의 입학생들의 성비를 살펴보면 단연 여자의 수가 우세한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사에 기록된 여성 미술가들의 수는 남성 미술가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보았을 때 조선시대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아예 여성의 초상화 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신분이 높은 왕의 초상화는 많이 남아 있어도 왕비의 얼굴은 드물게 기록되어 있다. 여성 화가들은 커녕 여성의 얼굴도 기록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상적 뿌리로 하여 한국 근현대 미술이 시작되던 시점인 1900년대 초반에 한국 최초라는 여러 타이틀을 단 여성 예술인이 등장하였다. 바로, 미술, 문학 그리고 사회 운동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활동하며 인정을 받은 인물인 나혜석이다. 한국 최초로 세계 여행을 떠난 여성이자, 한국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판매 수익을 거둔 ‘전업 작가’였다. 또한 다양한 글로 한국 여성들이 주체성을 갖도록 계몽 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쉽게 용인할 수 없었던 이혼의 과정과 이후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표명하였다는 사실 만으로 엄청난 지탄을 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다시피 되었다. 이는 그의 많은 업적들을 격하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혜석의 초상
나혜석은 동경 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미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여자미술전문학교는 나혜석 이후 박래현, 천경자 등 주요 여성 미술가들이 수학한 곳이다. 나혜석의 초기 미술 작품은 그가 학습한 당시 성행하였던 일본의 외광파 영향을 받은 풍경화가 주를 이루었다. 일본의 외광파란 프랑스의 인상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화풍으로 빛이 중심이 되어 거친 터치에 밝은 색채로 묘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의 특징은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였던 미술가에게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무분별하게 일본의 화풍을 추종하고,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글 <1년 만에 본 경성의 잡감>(개벽, 1947. 7)에서 나혜석은 묘법이나 도구에 대한 선택뿐 아니라 향토, 국민성을 통한 개성의 표현이 서양과 다른 조선 특유의 표현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혜석의 그림은 파리에서 수학하며 화풍의 변화를 주었다. 1927년 나혜석은 세계여행 중 8개월간 파리에 체류하며 로저 비시에가 주도하는 아카데미 랑송에서 수학하였다. 비시에는 야수파와 입체파 성격을 지닌 풍경화이자 인물 화가이다. 나혜석은 랑송에서 일본화되지 않은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과 야수파의 화풍을 익혀 그의 그림은 밝은 색채에 훨씬 넓어진 붓질로 편평한 화풍으로 변화하였다. 파리 체류 시기에 그린 누드화들 역시 현지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나혜석의 누드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몸의 비례나 골격이 서구 여성임을 알 수 있는데, 인상주의의 화풍보다는 해부학적으로 접근하는 정통 드로잉의 화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물화에서 역시 마찬가지의 성격을 보여준다. 유명한 나혜석의 자화상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좌상 구도의 작품으로 동양의 여성이 지닌 용모적 특징이라기보다 커다란 눈에 높은 코를 지닌 서양인의 얼굴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또한 당시 외국의 여성 미술가들이 자신의 특징을 내세우기 위하여 붓과 화구를 함께 그렸는데, 나혜석은 오직 자신의 모습만을 강직하게 그렸다. 나혜석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용모 역시 특이한데, 검은색 옷을 입고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의 처리로 그의 성격을 짐작게 해준다. 김우영의 초상에서도 얼굴의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접근하여 광대뼈와 코, 이마가 다소 강조되어 서양인 같은 외모로 보인다. 나혜석은 그의 인물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과 같이 구축적이고 단단한 느낌을 주로 표현하는 건축물의 풍경화에서 그의 장점이 부각된다. 실제로 그가 수상한 다수의 미전 작품들 역시 건축 풍경화들이다
나혜석이 남긴 과제들
나혜석의 자화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의 표정에서 시대를 앞서 태어나 남들은 겪지 않은 많은 사건들을 감내한 그러나 자기주장이 분명했던 여성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나혜석이 우리에게 남겨둔 메시지도 그렇다. 그의 글을 살펴보면 여성이 자존감을 가지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글의 논조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치우쳐 있지 않으나 자신의 경험을 빌어 서술하기에 호소력이 있다. 그 글들에 비하여 나혜석의 미술 작품들을 살펴보면 전위적인 페미니스트이거나 혹은 엄청난 묘사력이 돋보이는 기술적 특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아마 몇 년 더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분명 그림이 또 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나혜석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이혼 후 열린 1회의 개인전 이후로 그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발표하지 못하였다. 생의 후반부에는 근처에서 돌보아준 친지도 나타나지 않아 그의 남겨진 작품들은 진위 문제를 확인할 수 없다는 큰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한 미술사가는 나혜석은 이혼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이로 인한 풍문으로 얼룩져 잘못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나혜석의 지금까지의 상황은 여러 가지로 미술사가들의 연구에 문제점들이 있고, 또 감상자들에게도 해소할 수 없는 물음표를 많이 남겨 주었다. 그러나 나혜석의 삶의 대담한 행보를 중심으로 하여 그가 미술과 함께 걸어온 길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 미술가들 특히 여성 미술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나혜석은 최근 재평가할 가치를 인정받아 수원시에서 나혜석 거리를 지정하고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에 상시 전시실을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관심이 지속되어 편견이 없는 세상에서 그의 미술에 대한 결과와 열정을 다시 평가받길 바란다.
*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