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미술 읽기
삼라만상의 영고성쇠
오늘날 미술 시장에서 전통 동양화의 소재인 매난국죽을 그린 그림은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한국 전통 미술이라는 것도 희미해져버린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전통 미술이 변형을 보인다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미술가는 바로 고암 이응노이다. 이응노는 먹과 종이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새로운 미술을 창조시켰다. 충남 홍성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상경하여 김규진의 문하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의 초대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자신의 미술을 선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프랑스인들에게 동양화를 가르쳤다. 그러나 월북한 그의 아들의 소식을 듣고자 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무기징역 수로 복역한 동백림 사건과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납치 미수 사건의 배후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여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여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의 이름을 한국에서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자 호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준비하였고 전시 오픈 후 귀국을 준비하던 도중 사망하였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인 이응노의 미술 세계를 살펴보자.
이응노의 사생
이응노는 서울로 올라와 해강 김규진의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배우다 2년 남짓 되던 시점에 그림의 발전을 위해 독립하였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간판 집을 겸업하던 어느 날 바람에 흩날리는 대나무들을 보고 자신이 지금까지 그려온 대나무가 판에 박힌, 사의적인 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그 돈으로 일본 유학을 강행하였다. 이응노는 일본에서 사설 강습소인 가와바타 미술학교와 혼고 회화 연구소를 거쳐 개인 화실인 마츠바야시 게이게츠의 덴코 화숙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응노는 일본에서의 스승 중 마츠바야시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풍경화를 주로 그렸으며 10년간 산과 들을 비롯하여 농가의 마당까지 그가 본 풍경들을 모두 강박적으로 스케치하였다. 이는 단순히 스케치 기법을 위하여 사생을 많이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스케치를 하며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 자의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남들이 형성해 온 관념에 치우친 그림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이를 화폭에 담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런 이응노의 사실 탐구 행위는 필묵의 변화도 가지고 왔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는 활발한 시장의 상인들의 움직임과 느낌까지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붓질과 묵법의 개발을 이루어 냈다. 이러한 이응노의 변화한 화풍은 동양화단의 큰 수확이었다.
이응노의 사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 귀국하여 프랑스 화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프랑스에 대한 동경심을 품었고 프랑스행을 결심하기 이르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그는 프랑스어를 배우거나 그들의 추상화풍에 동화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외려 한자에 주목하였다. 한자는 동양의 추상화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서예의 구성 원리와 시각적 특성에 주목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서예뿐만 아니라 암각화와 아프리카, 고대 문자 등 다양한 문자를 작품에 등장시킨 추상화를 선보였다. 또한 종이를 뜯어 붙이는 등 거침없는 다양한 기법적 실험을 하였다. 이응노가 프랑스에서 사생한 것은 현실을 보는 것에 나아가 정신에 주목한 것이다.
이응노의 사람
1980년대 이후 이응노의 작품에는 수많은 군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어딘가에서 무얼 하고 있는 사람을 그렸고 그다음에는 문자를 활용하여 정신세계를 추상화하였다. 이응노는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의 무리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붓질은 하나의 사람 형상이 되고 또 이 사람은 화폭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군상을 이룬다. 이 <군상> 시리즈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이에 착안하여 그리기 시작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사태에 대한 관조 후 영감으로 그렸다고만 보기엔 아쉬운 면이 있다. 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래 사람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일반 사람들을 관찰하고 사생하였다. 또한 그의 행적 역시 이를 증명한다. 북으로 끌려간 양아들을 보기 위해 베를린에서 북 대사를 만났고, 이를 연유로 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가 옥중에서도 함께 복역하던 사람들에게 기운을 얻어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를 구명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에서까지 탄원서를 보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또 그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가 늘 작품에 담아온 화두인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는 특정인의 삶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삶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또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야 이겨나가는 것이고 또 즐거운 순간에는 함께 기쁨을 나누어 온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삶이 반증하는 <군상>의 서사적 특징은 국적을 불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주고 있다.
지필묵의 가치
이응노의 66년에 걸쳐 있는 작품들은 전통 사군자에서 동양화, 한국화라는 장르가 단단히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평생 유지했던 사생의 태도는 먹과 종이를 전근대적 사상에서 해방시켜 동시대의 미술과 조우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자유, 평화, 평등, 해방 등의 메시지는 작품의 서사적 특징이 되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전까지 이응노는 역사의 상흔에 다소 가리어져 그의 업적을 바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납북된 아들 때문에 받아온 오해들, 그리고 심지어 작고한 이후 이전 정권에서까지 이응노 미술관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도 있었다. 이제 이 모든 사건들을 잠재우고 이응노의 미술만을 올바르게 보아야 한다. 오늘날 미술의 장르를 구분 짓는 것은 다소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먹과 종이를 활용한 동양화는 분명 계속될 것이고, 그 위상도 재고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응노의 지필묵을 기본으로 하여 펼쳐진 미술 세계는 그 가치를 올바르게 인정받아야 한다. 이응노의 미술을 직접 보고 싶다면 충남 홍성의 생가 기념관인 ‘이응노의 집’과 대전의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서 언제든 감상할 수 있다.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이코노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