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Sep 25. 2020

묵직한 현의 울림

윤형근의 미술읽기

윤형근의 힘
  이우환과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등 생존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전개된 단색화는 한국을 넘어 세계 미술 시장의 문턱으로 이끌었다. 윤형근은 이들과 함께 한국의 추상 회화를 이끌던 주요 미술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그를 김환기의 사위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설명하곤 한다. 장식적이거나 화려함을 배제한 윤형근의 미술에는 김환기의 아우라를 넘어서는 힘이 존재한다. 대중들에게 그 힘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전시가 올해 초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열렸었다. 당시 작품을 비롯한 전시 구성에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4년 만에 베니스를 다시 찾은 윤형근의 작품들이 현재 전시 중인 포르투니 미술관은 세계인들과 함께 그의 미술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이탈리아의 고성을 채우고 있는 그의 그림은 여느 화려한 서양의 미술에 대적할만한 고답적이고 초연한 심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함보다는 우직함과 강렬한 힘을 전해 주는 그의 미술은 단색화라는 키워드가 한국 미술 시장을 이미 휩쓸고 지나갔다고 느낄 때쯤, 아직 우리 미술의 저력이 많이 남아있다는 듯한 힘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다. 윤형근의 그림은 어느 단색화가들보다 자연이라는 근본적인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캔버스의 마포와 천에 오일을 섞은 물감을 활용한 캔버스의 물질성 역시 요란한 기교를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굵은 붓으로 내그은 몇 개의 선들이 전부이다. 윤형근의 삶 역시 그의 그림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불의에 맞설 줄 알았으며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정의를 추구하였다.


윤형근의 삶
  청주에서 태어난 윤형근은 청주 상업학교 졸업 후 금융조합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입학시험장에서 서울대학교의 교수였던 김환기와 처음으로 마주하였다. 서울대학교 1회 입학생이었던 그는 서울대학교가 미군의 설립 하에 개교되는 것에 반발하여 시위에 참석하였다가 구류되고 제적되었다. 윤형근은 제적 후 홍익대학교에 편입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을 맞이하였고, 보도연맹에 끌려가 죽을 위기를 넘겼다. 한국 전쟁 때 형이 행방불명되고 가정이 어려워지자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하며 동생들의 학업을 도왔다. 그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그린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질곡의 역사를 몸소 경험하며 시간을 보낸 후 29살이 되어서야 홍익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김환기의 장녀와 결혼하였으며 숙명여고에 부임하여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입시비리를 고발하고 진상을 밝혀 달라고 주장하다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교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후 10년간 취업이 어려워지고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동네 파출소의 감시를 당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윤형근은 엄청나게 많은 그림을 창작하였다. 윤형근은 김환기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그를 신뢰하였고 또 흠모하였다. 초기의 윤형근의 작품에서 푸른색의 활용과 번짐의 효과는 김환기의 작품과 닮은 면이 많다. 그러나 차츰 윤형근은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윤형근은 자연에서 주로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였다. 오대산의 쓰러진 고목을 보고 이에 감화를 받아 종종 언급하며 흙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이는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검은색의 선이자 기둥이 내포하고 있는 힘이 되었다. 대부분의 검은 기둥이 수직으로 올곧게 서 있으나 유신 정권, 광주 사태를 목도하며 외부의 불의의 상황에는 기둥이 기울거나 흘러내리는 형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윤형근의 미술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전시하며 많은 호평을 받았다. 세계 미술계와 소통하는 그의 미술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아트 바젤에도 출품하며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윤형근의 천지문天地門
   윤형근의 마포에 그려진 검은색 사각형은 하늘을 의미하는 청색과 흙을 의미하는 암갈색을 오일에 섞어 큰 붓으로 그어 내린 것이다. 땅과 하늘이 만나 검은색을 이루며 새로운 문을 여는 그림이 생겨난 것이다. 윤형근은 이러한 자신의 그림을 천지문으로 정의하였다. 이 검은 기둥을 보며 평론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어 놓았다. 단색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의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그의 검은색 기둥은 침묵의 회화라고 하였으며 말을 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 말의 안으로 확산시키는 힘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미국의 평론가 조셉 러브는 윤형근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림을 보는 이가 눈을 뗀 다음에도 파고드는 강한 현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윤형근의 그림에서 한국 시골의 흙냄새가 연상된다고도 하였다. 조셉 러브는 그의 회화는 약삭빠르고 퇴폐적인 것을 거부하는 그의 천성에 기인한 회화라고 하였으며 인간이나 혹은 예술에서나 이런 유형의 참신함은 계속 권장되어야 할 자세라고 하였다. 또한 이우환은 윤형근의 중성화된 손의 힘이 캔버스와 매개되어 새로운 시각적인 장면을 창조하였다고 하였으며 철저한 자기 수련이 반영된 결과라고 논하였다.
  가만히 보면 볼수록 무한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윤형근의 회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윤형근의 회화 이론과 같이 하늘과 땅이 만나 붓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문은 오늘날까지도 묵직한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윤형근의 그림에서 물감과 오일이 만나 펼쳐지는 우연의 효과와 그 깊은 느낌은 가볍고 원색적인 현란한 이미지를 사는 시대에 전달할 수 있는 깊은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오래도록 시대를 넘나들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청다색, 1981, 마포에 유채, 25x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형근, 청다색, 1999, 마포에 유채, 182x29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청다색, 1976-1977, 면포에 유채, 162.3x130.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이코노미에 기고된 글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자유와 평화를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