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미술읽기
현대 미술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한다. 여기서 어렵다는 의미는 대개 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뜻이 추상적일 경우, 보이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경우이다. 그러나 모든 미술이 그런 의미를 갖고, 그런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미술가 장욱진의 그림이 그렇다. 장욱진의 그림을 보면 어린아이가 낙서를 하듯 단순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자연과 가족과 같은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소재로 구성되어있다. 색감도 마찬가지이다. 자극적인 색감을 사용하기 보다는 편안하고 한적한 분위기의 색을 주로 활용하였으며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먹과 물감, 판화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작가의 모든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가의 삶 역시 그림과 같은 방향을 추구하였다. 장욱진은 서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었고, 국가 프로젝트를 맡아 큰돈을 벌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현혹되지 않고 위신과 권위를 멀리하고 단순하고 우직하게 마음과 작품의 혼연일체가 되어 순수하게 자신의 길을 지키며 미술 세계를 전개하였다.
장욱진의 생애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을 그렸다. 장욱진은 20세에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여받고 상금으로 100원을 받자 가족들은 그의 미술 활동을 지지해 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졸업 후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장욱진은 일본에서 고향과 관련된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화풍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화풍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방 후 장인의 소개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에 취직을 하지만 2년 뒤 사직한다. 이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화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종군 화가로 잠시 활동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전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교수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6년 뒤 스스로 스승이라는 직업이 자신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전업 화가의 길로 전향한다. 이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덕소에 작업실을 마련하여 자연과 하나 된 삶을 시작한다. 장욱진은 가족을 두고 덕소의 아틀리에에서 주로 생활하며 창작활동을 이어갔는데, 이는 그의 가족이 더 애틋해진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아틀리에를 갖고 창작활동을 하는 미술가가 드물었던 때라 그의 행보는 주목을 받았다. 덕소가 차츰 개발이 되자 장욱진은 잠시 집 근처로 작업실을 이전했다가 더 멀리 수안보로 작업실을 옮긴다. 약 6년간 수안보에서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작업에 매진을 하였다. 69세가 되던 1985년 기관지염으로 그가 즐기던 술과 담배를 쉬기 시작하며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다시 용인으로 그는 작업실과 거주지를 옮겼으며 1990년 74세가 되던 해 고향의 생가를 방문한 후 갑작스레 발병하여 타계하였다. 이후 그의 추모 사업이 각지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고향인 충남 연기군을 비롯하여 양주시에서는 장욱진 미술문화재단과 협약을 맺고 장욱진 미술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그의 마지막 집인 용인 고택에서도 장욱진 전시를 지속하고 있다.
장욱진의 그림의 조형미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과 같아 순수함이 전해진다.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이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그가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몇가지 조형적 특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평면성과 균형성이 강조되어 있다. 또한 색채의 활용과 여백을 살린 그림의 구도는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이 느껴지도록 하는 요인이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그린 <자화상>을 보면 그러한 특징이 두각되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그린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잘 익은 벼들 사이 길을 걸어가는 양장을 입고 우산을 든 남자의 모습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과 남자의 뒤를 따르는 강아지까지 여유가 잘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로지르는 노랗게 물든 벼들은 풍요롭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신사의 외양을 제외하고는 모두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러한 생략은 더욱 자유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덕소 시기에 그린 <가족도>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평화로운 가족을 그렸다. 그는 집안을 가득 메우도록 사람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가족들이 한데 모여 그들 사이의 부족함이나 허물을 채워주는 모습과 같이 느껴진다. 특히나 따뜻한 색감의 이 그림은 양 옆의 나무를 배치하고 있으며 중앙 상단에 날아가는 네 마리의 새들까지 고루 균형을 잡고 있다. 1978년 명륜동에서 그린 <사찰>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부인을 따라 절에 다니던 시절 그린 것이다. 네 종류의 다른 집의 모형은 사찰의 모형을 간략하게 표현한 듯 하며 시점을 무시하고 각기 다른 곳에서 바라보는 듯하다. 그러나 앞에는 나무 뒤에는 산을 배치하여 전체적인 화면의 구도는 안정적이다. 수안보에서 그린 <흰 집>은 그가 수묵화적 표현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그린 것이다. 여백이 강조되어 그림 내에 위치하는 사물과 풍경들이 비교적 작아졌다. 이 작품은 해와 집, 나무, 사람 개를 수직으로 배치하고 나무 옆의 새를 좌우에 각각 세 마리씩 그려 대칭을 이루게 하였고 개와 사람 사이의 양옆에 식물을 하나씩 배치하여 비율을 맞추어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말년에 용인에서 그린 작품을 보면 균형감을 강조하던 과거에서 나아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88년에 그려진 그의 작품을 보면 커다란 나무에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된 새 한 마리가 있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다섯 채의 집이 모여 있다. 후기에 그린 그림에는 새가 자주 등장하고 나무 위에 붙어있는 집이나 타 작품에 등장하는 하늘을 날아가는 사람과 같이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난 사물들이 화면 안에서 자유롭게 연출된다. 그림의 기법도 자유롭게 활용되고 있으며 색감의 대비도 경쾌하게 사용되고 있다.
‘심플’의 미학
장욱진의 삶은 그의 그림과 매우 닮았다. 그가 자주 언급했고, 그의 묘비명에도 등장한다는 ‘심플’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그의 작품과 안 어울리는 영어이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다는 ‘심플’은 사실 말 그대로 단순하다. 장욱진의 생각과 실천, 삶과 작품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은 잘나거나 못나거나 혹은 모자라거나 넘쳐도 다함께 둥글고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나무, 새, 집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그림과 같이 평화롭고 조화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면 장욱진과 같이 순수한 눈과 마음을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것, 그게 바로 그의 ‘심플’의 핵심이자 가장 어려운 것이다.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