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Mar 25. 2023

진실하게 우는 것은 살아내기 위함이다

박노해의 '우는 걸 좋아한다'

우는 걸 좋아한다


박노해


우는 걸 좋아한다

웃는 건 꾸밀 수 있지만

우는 건 속일 수 없다


감동을 받을 때

슬픔을 느낄 때

아프고 서러울 때

눈물이 날 때의 그 진실한 기분

허위가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


비를 쏟은 하늘은 얼마나 해맑은가

비가 내린 대지는 얼마나 시원한가


울음만이 저 깊숙한 대지로 내려가

쌓여온 것들을 깨끗이 정화하고

무언가를 살아나게 하지 않는가


사랑은 우는 걸 좋아한다

하늘은 우는 걸 좋아한다

나는 우는 걸 좋아한다



원작  Boyana Petkova,  모작 무아


30대 초반에 '종합 심리 검사'라는 것을 받았다.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의 마음이 건강한지 아닌지 미리  확인해 보기 위해 수도회에서 받게 한 것이었다. 마음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종합검진이라고 보면 되겠다. 반나절이나 걸리는 긴 검사가 끝나고 나는 상담실에 불려 갔다.  상담사는  내게 그림 하나를 그려 주면서 말을 꺼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렇게 잔이 하나씩 들어 있어요. 평생 동안 우리는 이 잔에 분노와 화의 물을 채우며 살아가는 겁니다. 아이들은 잔의 저 밑바닥쯤까지만 물이 차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물의 높이가 계속해서 높아지는 거죠. 그래서 죽을 때쯤 되어야 물 잔이 비로소 가득 차게 되는 겁니다. 나이 든 분들 중 참을성이 없고 화병에 걸리는 분들이 많은 게 그런 이유지요. 그런데 당신은 32살에 이미 이 물 잔이 가득 차 버렸어요. 이 상태에선  마음의 잔에 물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쳐 버리고 말 거예요. 자꾸만 물이 넘쳐 버리니 고통스럽고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반드시 잔에 찬 물을 버리셔야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오는 길은 마치 불치병 환자라도 된 듯 캄캄하고 막막했다. 결국 수녀가 되기에도 부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내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은 오래 묵은 감정의 응어리였고 슬픔, 우울, 불안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이었다. 지도 수녀님은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기도로 극복가능하다며 나를 위로해 주셨지만 나는 사실 자격 미달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잘 참는 사람이었다. 백영옥 작가는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에서 '괴롭고 슬픈데도 눈물을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면 몸속의 울음이 우물처럼 고여 썩을 수 있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내면이 고이고 썩은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가득 찬 화를 깨달은 30대 이후로 나는 내 안에 쌓인 것들을 덜어내는 데 아주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많은 것들을 버리고 비우기 시작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은 마음의 물 잔이 수시로 넘친다는 느낌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감정의 동요가 줄어들었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조금은 말랑말랑해졌다. 힘겨운 고통도 하루이틀이면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검사를 다시 받는다면 내 마음의 물 잔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지 않을까?


부정적인 것들은 오래 두면 마음에 더 깊이 뿌리내릴 뿐이다. 살면서 늘 조금씩 비우고 덜어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가슴에서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시라도 울고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게 바로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내면에 억압된 고통, 분노, 슬픔, 우울 등을 안으로 삼키며 살 수만은 없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밖으로 내어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술가들은 글이나 그림, 음악으로 승화시키지만 평범한 이들은 눈물로 밖에는 표출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 앞에서 눈물 흘린다면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다른 사람 앞에서 안의 것을 맘껏 쏟아내는 데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당신에게 용기 내어 준 그 사람을 위해 부디 '울지 마라, 눈물을 거둬라.' 위로하지 말고 '넘치게 흘리라.'고 해주면 어떨까.


울음만이 저 깊숙한 대지로 내려가

쌓여온 것들을 깨끗이 정화하고

무언가를 살아나게 하지 않는가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살기 위해 울어야만 하니까. 나도 이제는 우는 걸 좋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