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종합 심리 검사'라는 것을 받았다.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의 마음이 건강한지 아닌지 미리 확인해 보기 위해 수도회에서 받게 한 것이었다. 마음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종합검진이라고 보면 되겠다. 반나절이나 걸리는 긴 검사가 끝나고 나는 상담실에 불려 갔다. 상담사는 내게 그림 하나를 그려 주면서 말을 꺼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렇게 잔이 하나씩 들어 있어요. 평생 동안 우리는 이 잔에 분노와 화의 물을 채우며 살아가는 겁니다. 아이들은 잔의 저 밑바닥쯤까지만 물이 차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물의 높이가 계속해서 높아지는 거죠. 그래서 죽을 때쯤 되어야 물 잔이 비로소 가득 차게 되는 겁니다. 나이 든 분들 중 참을성이 없고 화병에 걸리는 분들이 많은 게 그런 이유지요. 그런데 당신은 32살에 이미 이 물 잔이 가득 차 버렸어요. 이 상태에선 마음의 잔에 물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쳐 버리고 말 거예요. 자꾸만 물이 넘쳐 버리니 고통스럽고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반드시 잔에 찬 물을 버리셔야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오는 길은 마치 불치병 환자라도 된 듯 캄캄하고 막막했다.결국수녀가 되기에도 부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내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은 오래 묵은 감정의 응어리였고 슬픔, 우울, 불안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이었다.지도 수녀님은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기도로 극복가능하다며 나를 위로해 주셨지만 나는 사실 자격 미달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잘 참는 사람이었다.백영옥 작가는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에서 '괴롭고 슬픈데도 눈물을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면 몸속의 울음이 우물처럼 고여 썩을 수 있다'라고 했다. 어쩌면나는 그때이미 내면이 고이고 썩은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마음속에 가득 찬 화를 깨달은 30대 이후로나는 내 안에 쌓인 것들을 덜어내는 데 아주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많은 것들을 버리고 비우기 시작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은 마음의 물 잔이 수시로 넘친다는 느낌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감정의 동요가 줄어들었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조금은 말랑말랑해졌다.힘겨운 고통도 하루이틀이면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검사를 다시 받는다면 내 마음의 물 잔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지 않을까?
부정적인 것들은 오래 담아두면 마음에 더 깊이 뿌리내릴 뿐이다. 살면서 늘 조금씩 비우고 덜어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가슴에서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잠시라도 울고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게 바로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내면에 억압된 고통, 분노, 슬픔, 우울 등을 안으로 삼키며 살 수만은 없다.어떠한 방식으로든 밖으로 내어놓는 연습이 필요하다.그것이 '눈물'이라는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예술가들은 글이나 그림, 음악으로 승화시키지만 평범한 이들은 눈물로 밖에는 표출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그러니누군가 당신 앞에서 눈물 흘린다면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다른 사람 앞에서 안의 것을 맘껏 쏟아내는 데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직 당신에게 용기 내어 준 그 사람을 위해 부디 '울지 마라, 눈물을 거둬라.' 위로하지말고 '넘치게 흘리라.'고 말해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