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다. 늘 비슷비슷한 삶의 테두리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미래 역시 그다지 다를 게 없지 않을까 하는 답답함과 막막함이 밀려온다. 그럴 때면 우리는 짓궂은 개구쟁이처럼 두 가지 ‘만약’의 세계로 내달리곤 한다. 하나는 상상의 나래를 달고 꿈꾸던 미래 속으로 날아가 보는 것이다. 상상일 뿐이지만 흥분되고 짜릿하고 가슴이 뛴다. 잠시라도 보잘것없는 현실을 잊게 하는 마법의 ‘만약’이다. 다른 하나는 두렵고 끔찍한 미래를 그려 보는 것이다. 사악한 상상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다 보면 이내 지금의 현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된다. 나의 욕심과 어리석음에 머리를 한 대 쥐어박게 된다. 이것은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하는 마법의 ‘만약’이다. 그렇게 만약은 지금까지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미래 속에 나를 가져다 놓음으로써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상상의 묘약이다.
그럼 ‘만약’ 뒤에 따라붙는 말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듯이 ‘만약’의 세계도 가지각색일 것이다. 모두의 ‘만약’은 너무나 방대해서 여기에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보았음 직한 공통의 ‘만약’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일 것이다. ‘만약 내가 부자가 된다면?’ 같은 막연한 표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미치도록 실감 나는 말. 온몸의 잔털이 오소소 일어나면서 소름이 돋는 말. 심장이 멎을 정도로 충격적인 말. 아니 그냥 기적의 말.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만약’ 속에는 자신만의 은밀한 바람이나 두려움이 숨어 있다. 만약 내가 공모전에 당선된다면? 만약 내가 책을 출간한다면? 만약 내가 공무원을 그만둔다면? 만약 내가 불치병에 걸린다면? 만약 내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면? 만약?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마음속 비밀들이 ‘만약’의 문 뒤에 숨어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 어떤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고 어떤 것은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고통스럽다.
하지만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은 장난 같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가볍고 유쾌한 ‘만약’에 속한다. 내가 품었던 수많은 ‘만약’들에 비하면 실현 가능성이 가장 없는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나도 그래’라며 맞장구를 쳐 줄 공공연한 ‘만약’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대부분 부자가 되기를 노골적으로 꿈꾸고 있다.
완벽한 무소유를 실천하고 사는 수도자나 이미 경제적 자유를 달성한 부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 횡재수를 타고났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대박을 기대하지도 않기에 로또를 자주 사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똥 꿈이나 홍수 꿈 등 소위 길몽이라는 걸 꾼 날에는 꿈값이 아까워서 로또를 사기도 한다. 로또를 사면 일주일 내내 달콤한 ‘만약’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마음속에선 이미 엄청난 부자가 되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다양한 방법들까지 궁리하고 있다. 왠지 그 일주일 동안은 까칠한 상사도 고약한 거래처도 싹수없는 친구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당첨 번호가 발표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냉수를 한 바가지 들이켜면서 별 볼 일 없는 현실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만약’은 무슨 얼어 죽을 만약. 이번 생은 아무래도 글렀나 봐.라고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축 처진 어깨로 침울해하다가 이내 혼자 웃는다. 그래도 잠시 즐겁고 행복했잖아? 그럼 됐지 뭐. 누구에게도 무해한 일주일간의 ‘만약’이었을 뿐이다. 만 원과 맞바꾼 즐거운 일탈이었을 뿐이다. 이왕이면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만약’ 말고, 천국으로 가뿐히 날아오를 ‘만약’ 속에서 살아보자. ‘만약’의 세계 중에서 지옥은 하나하나 잡초를 뽑듯 쏙쏙 솎아내 버리고 천국만 골라 하나하나 씨앗을 심듯 가슴속에 묻어 놓자. 세상일을 누가 아는가? 복권도 매주 사면 당첨될지 모르는 일이고, 글도 매일 쓰면 당선될지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내가 잠시 모시던 교장 선생님은 오로지 한 번호만으로 매주 복권을 산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당첨이 안 되면 그 번호를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고 했다. 참으로 놀랍고도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정도 집념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당첨되고야 말겠는데? 그 방법이 혹했지만 내겐 평생을 공들일 ‘신의 번호’가 없었기에 조용히 그만두고 말았다.
‘만약’은 허황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지만 마냥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상상은 언제나 그렇듯 현실이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고 이끌어주곤 한다. 나침반처럼. 나는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만약’들을 들여다보며 지금의 삶을 조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