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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Nov 25. 2023

설마, 그 사람이 내게 그랬다고?

험담의 세계, 그럼에도 사람을 믿어야만 하는 슬픔

설마

 - 그 리는 없겠지만.

 - 부정적인 추측을 강조할  쓴다.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반백이 이젠 삶의 때가 적당히 타서 의심이 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사람의 진정성을 믿는. 내가 순진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이 한결같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좋아하면서 조금은 미울 때가 있고 맘에 안 드는 부분도 생기불편해지기도 하는 마음이다.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이 반반일 수도 있다. 아예 싫어하는 마음이 더 클 수도 있다. 마음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자기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적어도 마음과 행동이 서로에게만은 투명하고 정직했으면 좋겠다. 마음 따로 행동 따로인 두 얼굴의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종종 삶의 의욕을 심각하게 꺾어버릴 만큼 무겁고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스스로를 다그치는 말

밤잠을 설치며 이불킥을 날리게 되는 분노의 말

세상살이에 잔뜩 주눅이 들어버리는 말

사람이 두려워지는 말


설마,  그 사람이 내게 그랬다고?




교사 시절, 나는 젊고 순수했다. 내 칭찬이 아니라 그냥 갓 대학을 졸업한 순진한 여교사였다는 얘기다. 학생들에게도 동료교사들에게도 호의적이었다. 그들을 싫어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입시로 팍팍한 고등학교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고 교사이지만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가 눈과 귀를 열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동료교사들은 내게 '아이들과 상담을 가장 많이 하는 교사'라는 요상한 딱지를 붙여 주었다. 딱지에는 칭찬 같기도 하고 비난 같기도 한 애매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고 있겠구나 하고 짐작은 했었.


나는 동료교사들 중 특별히 마음에 안 들거나 싫은 사람은 없었다.  정도로 남에게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교무실 그것도 옆자리나 앞자리에 앉은 교사와 각별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언젠가 나보다 연배가 높은 교사와 짝이 되었다. 담임한 반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나는 그분을 일적으로 많이  도와드렸고 반 아이들도 내 반 아이들 못지않게 예뻐했었다. 나는 늘 그분께 친절했고 진심으로 대했다.  그분 역시 내게 싫은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게 이런저런 도움을 청하는데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기꺼이 그분을 도왔다. 그분과 좋은 관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기가 막힌 소리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분이 내 욕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아주 많이! 배신감이 밀려왔다. 내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그분을 도와주고 잘해 줬던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해되었겠지만 그 사람이 그랬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사람이 내게 그랬다고?


사람이 두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풋내기가 처음으로 사람을 믿는 슬픔이 무엇인지배우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세상엔 그런 류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쪽 같이 숨겨서 끝까지 모르고 지나가면 좋을 것을 어느 날 야누스의 얼굴로 나를 대했던 사람임을 알게 되면 큰 충격과 고통에 휩싸였다. 주로 가까이 지내면서 믿었던 사람들이 뒤통수를 다. 나와 먼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도 않거니와 한다 해도 내 귀에까진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런 사람을 만났다. 아주 좋아하고 아끼던 사람이었다. 상대도 내게 잘했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보이는 대로 덜컥 사람을 믿어 버렸다. 그런데 그 사람도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이 들통나자 나를 공격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 사람에게 화가 난다기보다 사람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나 자신이 한심해 죽을 거 같았다. 지금도 딱히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그 교사도 몇 년 전에 만난 그 사람도 그냥 내가 싫었던 것 같다. 근데  싫으면 멀리하면 될 것을 어떤 목적에서든 내게 접근했고 친절했고 좋아하는 척을 했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위축되고 인간관계에 겁이 나기 마련이다. 사람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진실한 사람들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늘 한 발 뒤로 물러나 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참으로 씁쓸하고 쓸쓸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시오패스라는 말이 수년 전부터 유행했다. (특히 김경일 박사의 강의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만난 사람이 그렇다고 단정 수는 . 하지만 험담을 지나치게 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려 는 행동은 소시오패스의 대표적인 특성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 이제는 험담을 쉽게 하는 사람은 아무리 내게 잘해 주고 친절해도 일단은 멀리 하자는 나만의 생존방식을 터득했다. 험담이 가벼운 수다 수준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심각한 모함이나 모욕으로까지 치닫 사람들이 다. 그것도 자기 가족이나 친구, 가까이 지내지인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한다면 그는 무조건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하다. 그러니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적당히 내 마음을 숨기거나 표현하며 산다. 적어도 싫은 사람과 일부러 가까이 지내지는 않으며 사회적 친절 이상의 호감을 보여 내 편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향해 모욕이 될 정도의 험담은 하고 다니지 않는다. 싫은 사람은 되도록 멀리 하다 보니 험담할 거리가 생기지도 않는 법이. 수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믿는 것은 이따금 슬플 때도 있다. 그래도 사람을 믿어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험담의 세계와 사람을 믿는 슬픔은 정비례하는 것 같다. 험담이 많아질수록 험담하는 이도 험담의 대상이 되는 이도 삶이 더 슬퍼지기만 할 이다. '설마, 그 사람이 내게 그랬다고?' 이 말은 살면서 다시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참으로 슬프고 허무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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