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이와 너, 그리고 미지의 남자

by 소위 김하진

너는 섬에 남기로 했던 애초의 목적을 잊어버릴 만큼 재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마냥 좋았다. 밤이 되면 방 한가운데 투명한 담을 세우고 고치처럼 이불을 말고 누웠다. 너는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숨이 차곡차곡 쌓여 천장에 차오를 때까지 잠든 재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 듯 밤의 침묵 속에 고요히 파묻혀 있는 게 좋았다. 재이와 함께 그럭저럭 때우는 끼니도 좋았다. 할아버지의 밥통에서 밥 두 그릇을 수북이 퍼다가 작은 상에서 머리를 맞대고 먹었다. 조미김과 참치 통조림, 익히지 않은 햄과 폭삭 신 김치가 꿀보다도 달았다. 가끔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달걀부침에 반찬을 한꺼번에 쏟아 넣고 비벼 먹으면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이외엔 느릿느릿 해변을 거닐었다. 딱히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달팽이처럼 꾸물꾸물 기어갔다. 너의 삶에서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완벽한 게으름이었다. 매일같이 섬 주변을 돌았지만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똑같은 파도가 6시간 12분마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둘이 남긴 발자국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곤 했다. 그렇게 바다는 무언가를 덮어 버리는 데 열중했고 둘은 그것을 들춰내기 위해 애를 쓰면서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야릇한 유혹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대로 영원히 둘이 함께 파도 속으로 휩쓸려, 지워져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사진에 적힌 날짜와 같은 날이 되었다. 섬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을 간단히 차려 먹고 바다로 나갔다. 천일홍 꽃밭이 있는 언덕을 지나 바닷가를 따라 계속 걸었다. 길이 끊기는 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게 아침마다 반복하던 산책 코스였다. 그날도 특별한 건 없었다. 바다는 어제와 같이 조용히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시치미를 떼는 음흉한 범죄자처럼. 시간도 심드렁한 방관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탈해지고 있었다. 밤이 되자 들뜬 처녀의 눈동자 같은 만월이 섬 전체를 가득 에워쌌다. 숨 막히게 밝은 달빛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껍데기를 벗은 게들이 후다닥 몸을 숨기며 달아나고 천일홍의 마른 꽃봉오리 위에는 새하얀 달빛이 눈처럼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둘은 시리도록 흰 풍경을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언덕 너머 바닷가에 남자 하나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 뒤 그 남자는 뱀이 허물을 벗듯 아주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깡마른 몸이 달빛과 어둠이 뒤섞인 속에서 은회색으로 빛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꼿꼿하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얼핏 보면, 육지가 아닌 바다에 속한 생명체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남자의 몸을 덮쳤을 한기가 너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너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겨울 밤에 수영이라니.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혀 다급히 재이를 불렀다.

“재이, 저기 좀 봐. 지금 저 사람 바다로 들어가려고 하는 거 같아.”

“그러게요. 이 밤에 위험할 텐데. 얼른 가 봐요.”


너와 재이는 서둘러 달려 내려갔다. 남자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몸이 절반쯤 물에 잠겼을 때 둘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재이는 온몸을 콤퍼스처럼 휘적거리며 성큼성큼 달리다 이내 몸을 던져 헤엄쳐 갔다. 그는 이미 몸의 삼 분의 이 이상이 물에 잠겨 버린 상태였다. 둘은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지만 결국 남자는 재이에게 붙잡혀 끌려 나왔다. 너는 바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두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달빛은 야속할 정도로 환해서 둘의 얼굴이 실제보다 두 배는 커다랗게 부풀어 보였다. 먼바다 너머에서 정체 모를 부연 빛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쇠락한 노인이었다. 얼굴 가득 달빛으로도 펴지지 않을 만큼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두 남자가 눈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너는 그만 숨이 턱 하고 멎어 버렸다. 동시에 너를 둘러싼 세상도 완전히 정지해 버린 것만 같았다. 아무런 빛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생이 희미해져 버린 남자, 죽음과 은밀히 내통한 듯 어둡고 암울하기만 한 남자. 그 남자는 바로 ____ 사라져 버린 아빠였다.


남자의 입술은 새까맸고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심장마비가 왔는지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헉헉거리고만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대나무가 꺾이듯 폭삭 고꾸라져 버렸다. 재이는 남자를 들쳐 엎고 보건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너도 곁에서 함께 달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가, 아니 아빠가 지금 당장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만이 눈앞을 깜깜하게 뒤덮었다. 보건소에서는 급히 응급 헬기를 불렀고 남자는 육지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모든 게 단 한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나, 그 남자 얼굴 봤어요?”

“응, 봤어.”

“그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제가 예전에 찾았던, 여자의 첫사랑이요.”

“뭐라고? 아니야. 그 남자는 아빠였어. 많이 늙었지만 한눈에 알아보겠더라고.”

“아버지라고요? 그럴 리가요. 사라진 남자와 누나의 아버지는 서로 다른 사람이잖아요. 그 남자는 제게 자기를 김승일이라고 했어요. 여자가 찾는 첫사랑이라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천호 아니었던가요?”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한 거지? 그리고 여자는 왜 남자를 찾아줘서 고맙다고 했을까? 자기가 찾던 첫사랑도 아니었는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내일 병원에 가 보도록 해요. 진실을 알려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을 테니까요.”


동이 트자마자 둘은 첫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 이상하게도 너는 아빠를 만나게 된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바닷가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본 순간, 이미 아빠라는 걸 눈치챘던 것일지도 몰랐다. 오랜 세월 아빠를 기다리고 그리워했던 막내딸은 아빠의 존재를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파랑새를 처음 본 순간부터였을까? 너의 아득한 기억 너머 어딘가에는 아빠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이 파랑새라는 희곡집이었다는 사실이 깊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처음 눈앞에 나타났던 순간부터였을까? 그녀의 절박한 눈동자에 부딪히는 순간 이 모든 게 정해진 운명이라는 걸 어렴풋이 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다. 다 아니다. 이건 단지 어젯밤 섬 위로 떠 오른 보름달 때문일 것이다. 미칠 듯이 환한 그 달이 너에게 진실을 한꺼번에 일깨워준 것이다. 달은 한자리에서 내내 지켜보고만 있었을 테니까. 네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리고 알아선 안 되는 것들까지도 모두 다.



https://youtu.be/EXpow_5y4-o

이 소설을 계속해서 읽어 주신 분이라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다는 걸 알겠지요. 세 사람을 떠올리며 들을 만한 노래입니다. 단편 영화 같은 뮤직 비디오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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