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qorNlyKW_4?si=Ok2Uhsqq5VKdBVWP
너와 재이, 그리고 엄마, 또 다른 영이. 네 사람은 영원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 바람은 적당히 서늘했고 햇살은 미지근했다. 파도는 누운 듯 잠잠했고 갈매기들은 더이상 너를 숨 가쁘게 쫓아오지 않았다. 비밀을 숨긴 듯 음흉해 보이던 바다의 표정도 이제는 앨범 속 오래된 사진처럼 희미하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영원도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출산하는 여자의 자궁문이 벌어지듯 영원도로 들어가는 문도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뱃머리가 영원도에 막 들어섰을 때쯤 너는 천일홍 언덕 주변을 날고 있는 파랑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오래전 사무실에서 날려 보냈던 바로 그 파랑새였다.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재이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또 다른 영이만이 뚫어지게 영원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서늘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여자도 파랑새를 보았을까? 너는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몰래 훔쳐본 그녀의 눈동자에서 짙검은 먹구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금세라도 소낙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눈이었다.
영원도에 발을 내디뎠을 때, 왠지 세상이 덜컹 주저앉는 느낌이 들었다. 네 사람의 각기 다른 마음의 무게 탓이었을까? 땅이 제각기 다른 깊이로 파여 울퉁불퉁해졌다. 휠체어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퉁퉁거렸다. 팔에 안간힘을 주며 끙끙거리자 재이가 다가와 살며시 휠체어를 대신 잡았다. 너는 조용히 물러나 엄마 옆으로 갔다. 휠체어와 나란히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엄마, 영원도에 다시 왔네. 알아보겠어? 엄마는 대답 없이 바다 너머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감정도 마음도 읽을 수 없는, 잿빛 눈이었다. 넷은 천천히 천일홍 꽃밭이 있는 언덕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휠체어가 더는 갈 수 없는 곳에 도착하자 재이가 엄마를 등에 업었다. 잔잔한 가을바람이 귓가를 간질였고 바람 사이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천일홍 향기가 콧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덕 위에 다다르자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넷은 한동안 멍하니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만개한 천일홍들은 핏물이 흩뿌려 스며든 것처럼 선연히 붉었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전설 하나가 떠올랐다. 순결을 지키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죽은 자리에 전에 없던 붉은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꽃에 그녀의 피가 스며들어 있어서 그토록 진하고 붉은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그 꽃을 꺾는 자가 있다면 세 가지 저주를 받게 되는데 하나는 사랑을 잃는 것이고, 둘은 길을 잃는 것이며, 셋은 자기 자신마저 잃게 된다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천일홍 역시 누군가의 혼이거나 한일지도 몰랐다. 무거운 생의 회한을 가득 짊어진 채로 가느다란 줄기들이 꺾일 듯 말 듯 흔들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자들은 모두 꽃을 꺾는 죄를 저지른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어 누군가의 영혼을 짓밟거나 진실을 유기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사랑을 잃고 길을 잃고 급기야는 자기마저 잃어버린 채로, 생을 헤매고 다니는 저주에 붙들리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남녀, 어쩌면 재이와 너, 또 다른 영이조차도. 모두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천일홍 꽃밭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맨발로 뛰놀던 무구한 아이가 되어, 첫사랑에 몸이 닳던 철부지 소녀가 되어, 그리움에 실성해 버린 여인이 되어, 심지까지 타들어 가 소멸하는 노인이 되어. 천일홍 꽃밭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엔 그녀의 모든 생이 겹겹이 포개어져 있었다. 너는 엄마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천일홍 꽃밭 속에서 추는 엄마의 마지막 춤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영이 씨, 천일홍 꽃밭은 저희 엄마와 영이 씨 엄마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에요. 이곳 영원도도 그렇고요. 실제로 와 보니 어떤가요?”
“미국에 살 때 엄마는 틈만 나면 천일홍이 피어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곤 했어요. 하지만 매번 똑같이 실망했지요. 진짜 천일홍은 영원도에만 피어 있다고 하면서요. 제가 보기엔 다 같은 꽃인데 말이죠. 하지만 엄마에겐 이곳, 영원도의 천일홍만이 유일했어요. 결코 잊을 수도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도 없는 자기만의 생이 피어 있는 꽃이었으니까요.”
“저희 엄마도 이곳에 생의 아름다움 전부를 묻어 두고서 내내 그리워하며 살았어요. 사랑을 잃고 길을 잃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 채로요.”
“영이 씨는요? 사는 게 어땠나요? 듣기론 박천호라는 분이 아버지이고 오래전에 집을 나가셨다고 하던데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예 아빠가 없었어요. 사라진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겠죠?”
“글쎄요. 저는 상실을 인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나를 잃어버린 채로 살았죠. 영이 씨는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나요?”
“상실과 부재는 다를 거예요. 어쩌면 상실이 부재보다 더 큰 결핍과 고통을 가져오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빠가 영이 씨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네. 하지만 제겐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어쩌면 여기에 올 수도 있어요. 저는 그러길 바라고 있고요.”
너는 또 다른 영이에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해 질 무렵 넷은 천일홍 꽃밭을 떠나 슈퍼로 향했다. 하룻밤을 영원도에서 묵고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간 여러 차례 나눈 통화 때문인지 예전과는 달리 반가운 얼굴로 너를 맞이했다. 이제 슈퍼의 매대는 텅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이 좁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듯 싸늘하고 스산했다. 가을이 지나면 슈퍼 문을 그만 닫아야지. 어쩌면 너와 일행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방문객일지도 몰랐다. 매번 묵던 방에서 너와 엄마, 또 다른 영이가 자기로 했고, 재이는 할아버지 방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쪽방을 빌렸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천일홍 액자는 예전 그대로였다. 언젠가 천일홍 꽃밭이 없어지고 이곳에 왔던 이들이 다 사라진다 해도 액자만은 오래도록 남아 모두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꽃밭을 헤매느라 고단했는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숱한 말들이 머뭇거리며 제자리걸음만 했다. 너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말들을 꾸역꾸역 되삼키며 또 다른 영이 옆에서 성근 잠을 잤다. 그리고 동이 트기도 전에 서둘러 슈퍼를 나섰다. 방문객들을 보내는 할아버지의 눈빛 속에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너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마르고 주름진 손을 잡았다.
“천일홍 꽃밭이 없어져 버린다 해도 다시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꼭 건강히 계세요.”
할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얼굴 가득 패어 있는 깊은 고랑들 사이로 옅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할아버지는 방문객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도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영원도를 떠나는 배를 타기 전에 천일홍 꽃밭을 다시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넷이 언덕 위로 올라갔을 때 태양은 막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새벽이슬을 맞은 천일홍들은 젖은 몸을 말리지 못한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어제와 달라진 풍경에 어쩐지 가슴이 설었다. 문득 천일홍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순간 엄마가 일어서더니 천일홍 꽃밭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 모든 생의 무게를 짊어졌지만 어쩐지 나비처럼 가벼워 보이는 걸음이었다. 엄마가 아빠 바로 옆까지 다가가자 아빠가 몸을 돌렸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기만 했다. 살다 보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두 사람 가슴속에 쌓여 있던 오래된 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둘은 침묵이 내려앉은 무거운 눈썹을 끔벅거리며 서로를 한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지났을까? 아빠가 먼저 엄마의 두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진 않았다. 분명한 건 엄마가 아빠의 손을 잡고 말간 햇살처럼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오라지 사랑뿐이던 여인으로 돌아간 엄마의 눈동자는 어느새 투명할 정도로 희어져 있었다.
한참 뒤 또 다른 영이가 둘이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와 재이는 뒤에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영원도의 바다와 천일홍과 세 사람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가슴속 어딘가에 영원히 사무칠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와 박천호, 그리고 이홍주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김승일 역시 어딘가에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눈앞에 있는 이들도, 영원도의 바닷속에 수장된 두 남녀도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까? 산다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고 동시에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되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너는 문득 옆에 있는 재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이 역시 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마주쳤을 때, 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서 나와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암묵적 동의가 담긴 미소였다. 아마도 저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잃은 것도 나일 뿐이고 찾은 것도 나일 뿐이다. 그리고 한 번도 정말로 잃어버린 적은 없었던 것이다. 너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파랑새들을 바라보았다. 파랑새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모두의 파랑새들이 각기 다른 빛깔의 울음을 울면서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었다. 태양은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까지 떠올라 있었다. 노근노근한 햇살에 물기를 바짝 말린 천일홍들이 한층 가벼워진 몸을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너는 재이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재이가 너의 손을 잡았다. 둘은 나란히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일홍의 살풋한 향기 속으로.
너에게서 나와, 너에게로.
* 그동안 중편 소설 '너에게서 나와, 너에게로 갔다'를 읽어 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를 출간하면서 알게 된 건 아무리 여러 번 퇴고한 후 올렸어도 브런치에 올린 글은 초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이제부터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설프기 짝이 없는 초고를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면서도 송구한 마음입니다. 떠나보내기 못내 아쉬운 등장인물들 모두와 함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들 마음속에 간직한 영원도와 천일홍을 하나하나 찾아가시길 빕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나 자신도요....
그리고 제 신간인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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