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z6_rPyY5TY?si=qmyMzGv3Y_cH5Wt5
엄마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너를 알아보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고, 멍한 눈으로 넋이 나가 있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을이 오면 엄마를 모시고 천일홍을 보러 가기로 했다. 어쩌면 천일홍 꽃밭도 엄마의 목숨도 서서히 세상에서 지워져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영원도가 엄마의 처음을 지켜봐 주었듯이, 엄마의 마지막도 지켜봐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재이로부터 전화번호 하나를 받았다. 재이가 승일이라는 남자를 찾아다닐 때 알게 된 번호였다. 바꾸지만 않았다면 그건 아빠의 휴대전화일 거였다. 너는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다. 어차피 전화는 받지 않을 테니까. 문자창에 1이란 숫자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들어가 보면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심장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아직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빠가 어딘가에 살아서 너의 이야기에 응답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아빠는 더이상 사라져 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서 일방적으로 보내는 문자라 오히려 편했다. 아무 때나 떠오르는 말들을 마음대로 남겼고 아빠가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도 않았다. 일기를 쓰듯, 때로는 편지를 쓰듯 너는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뱉어 냈다. 그리고 그 말을 곡괭이 삼아 오랜 시간 막혀 있던 아빠에게로 가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문자창의 1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될 그 어떤 날을 대비하기 위한, 아빠라는 존재를 향한 너의 마지막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날은 여자가 죽기 전에 딸에게 보낸 메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 남녀의 일그러진 사랑에 넌더리를 치면서. 어떤 날은 나날이 소멸해 가는 엄마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당할 길 없는 연민에 빠져 거침없이 아빠를 힐난하고 증오했다. 또 다른 날은 사라져 버릴 영원도의 천일홍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천일홍은 이제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시들지도 마르지도 않는 고통이자 이미 오래전에 부서져 버린 아름다움이었다. 네 남녀의 삶과 사랑이 뒤엉켜 박제되어 버린.
이따금 오래 잊고 있던 아빠와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면 낯선 그리움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던 원망과 증오를 휘발시켜 버렸다. 하지만 모든 게 깨끗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이미 지울 수 없는 검댕이 되어 버린 것들도 많았으니까. 말하지 못할 것도, 해서는 안 될 것도 없었다. 검댕을 박박 긁어내다 보면 가슴에 작은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한 번도 뚫린 적 없던 그 구멍 안에서 케케묵고 냄새나는 것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시원했지만 동시에 미치도록 쓰라렸다. 하지만 구멍이 한 개 두 개 늘어날 때마다 너는 분명 가벼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너도 모르게.
‘아빠가 품바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 사다 준 모래시계들 기억나?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사다 줬잖아. 아빠가 사라져 버린 후에 나는 그것들을 몽땅 내다 버렸어. 근데 딱 하나만은 도저히 버리질 못하겠더라. 황금빛 모래가 쏟아지던 모래시계 말이야. 모래 더미 안에 종이로 만든 작은 천사 인형이 파묻혀 있었잖아.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모래가 사르륵 아래로 쏟아지면서 천사가 잠에서 깨어나 모래시계 속을 날아다니곤 했지. 아빠는 그게 꼭 나 같다고 했었어. 나는 정말이지 아주 오랫동안 모래 무덤 속에 파묻혀 있었던 거 같아. 아무도 모래시계를 뒤집어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재이가 나타난 거야.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수십 년은 더 산 사람 같았어. 그런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모래시계를 뒤집어 버린 거야. 그리고 나를 다시 날게 해 줬어. 지금도 내 눈앞엔 모래시계가 놓여 있어. 아빠의 시간은 도대체 어디쯤에서 멈춘 것일까? 이제부터라도 다시 흐르게 해 줄게. 내가 모래시계를 뒤집을게. 아빠.’
재이와 너는 아빠의 낡은 아파트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동굴처럼 컴컴한 아파트 꼭대기에는 여전히 무릎이 늘어진 추리닝 차림의 젊은 남자가 살고 있었고, 초인종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저희 또 왔어요. 혹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몰라요.’라는 퉁명스러운 말만 남긴 채 남자는 꽝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북카페 주인 역시 늘 그랬듯 책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고 무료하고 느릿한 공기만이 카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실망이나 아쉬움 같은 것도 없었다. 아빠를 찾으려 했다기보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너에게 더이상 사라져 버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숫자 1의 존재로 남은 아빠였지만, 그 숫자 1로 인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해 여름은 땀구멍에서 쉬지 않고 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겨울이 길고 추우면, 그해 여름은 더 혹독하다더니 숨 막히는 더위가 도시를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너는 내내 사무실에 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재이와 정훈도 멍하니 앉아 빈둥거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제 더는 사라져 버린 사람을 찾으려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 역시 알게 되었을까? 애초에 사라진 건 없었다는 사실을? 그러니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너는 영원도에 있는 슈퍼 할아버지에게 종종 안부 전화를 걸어 천일홍 꽃밭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아직도 공사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은 소문으로는 땅 주인이 큰 소송에 휘말려 지체되는 것 같다고 했다. 천일홍 꽃밭이 그대로라는 말을 전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너 역시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언 발이 녹듯 스르르 풀어지곤 했다. 시간이 갈수록 천일홍 꽃밭을 보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너는 아빠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천일홍이 만개하면 영원도에 갈 거예요. 엄마에게 마지막 천일홍을 보여 주려고요.’
이미 끝나버린 사랑 앞에서 질척거리는 못난 남자 같은 여름이었다. 투박하고도 질겼다. 문자창의 1도 오랫동안 그대로였다. 하지만 발을 질질 끌며 떠나지 못하던 여름이 어느 날 거짓말처럼 끝났다. 그리고 1도 돌연 사라져 버렸다. 아빠가 드디어 읽은 거였다. 이제는 영원도에 갈 날짜만 정하면 되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떠올랐다. 또 다른 영이. 너는 그녀를 영원도에 데려가기로 했다. 영원도의 바다와 천일홍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박천호라는 남자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또 다른 영이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너의 아빠를.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생각보다 개화가 빠르니 서둘러 오라는 재촉이었다. 너는 당장 떠나기로 했다.
모두의 시작이기도 끝이기도 한 영원도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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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영상은 '김지수 기자'님께서 만들어 유튜브에 올려 주신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지닌 분으로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를 돕기 위해 이렇게 멋진 영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김지수 기자님(돈 기자의 브런치스토리)은 브런치스토리 작가님이시고 [내가 만난 명의, 그리고 환자들]을 연재 중이십니다. 글이 아주 깊이 있고 좋았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당분간 활동을 중단하신다고 하네요. ㅜㅜ
하지만 인스타와 유튜브에서는 계속 활동하신다고 하니 많은 구독과 응원 부탁드릴게요!!
기자님의 브런치스토리를 방문해 보시거나, 유튜브는 아래 쇼츠를 타고 들어가셔도 됩니다. 인스타는 jisu2100을 검색하시면 됩니다.^^
* 前 연합뉴스ㆍ연합뉴스TV 기자 (2023년 2월, 연합뉴스 퇴사)
* 17년 간의 기자 생활 중 대부분 보건의료 전문기자로 활동.
* 연합뉴스TV 생방송 건강정보 코너《김지수의 건강 36.5》진행
* 연합뉴스TV 생방송《김지수의 글로벌 브리핑》진행 등 국제뉴스 앵커.
* 《3,923일의 생존 기록》저자.
https://youtube.com/shorts/DIPqe4B27-s?si=g0Thf-Drj2rKlF1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