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두 번째 편지, 부서진 세 남녀

by 소위 김하진

https://youtu.be/O-Bsy-nJn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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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보다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스치듯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5월의 때 이른 더위 탓인지 거리엔 무거운 짜증이 먹물처럼 번졌다. 재이와 정훈이 에어컨을 켤지 말지를 가지고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어수선한 공기를 깨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그건 여자의 딸에게서 온 전화였다. 놀랍게도 엄마로부터 메일이 왔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용건이었다. 메일은 아주 오래전에 발송한 예약 메일 같았다. 그러면서 여자는 메일 속에 등장하는 남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의뢰도 했다. ‘박천호’라는 이름의 남자이자 사라진 너의 아빠를. 너는 편지에 적힌 딸의 이름 위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영아,

네가 이 메일을 받을 때쯤이면 엄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란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꼭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쓴다. 모든 걸 가슴에 묻고 떠날까도 생각해 봤지만, 진실은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게 아니더구나. 때로는 숨겨선 안 되는 진실도 있는 법이고.


천호와 나는 어려서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단다. 우린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했지. 학교 연극부에서 틸틸과 미틸이 되어 함께 연기한 적도 있었단다. 그땐 정말로 ‘파랑새’를 찾아다니던 순수하고 철없던 시절이었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너도 알 거야.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엄마가 자살 소동까지 일으키고 나서야 마지못해 뜻을 굽혀 주셨단다. 어찌 됐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걸 가진 듯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를 만났지. 나의 승일이를. 천호는 유리알처럼 투명했다면 승일이는 돌멩이처럼 속이 보이질 않았어. 왜 인간은 미지의 것을 보면 속절없이 끌리고 갖고 싶어지는 것일까. 그런 본능이 진짜 사랑이긴 한 걸까? 우리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단다. 셋 다 연극에 미쳐 있었지. 각자의 궤도를 돌면서 먼발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시고 숨이 막혔다. 어쩌면 서로를 다가갈 수 없는 태양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이름은 ‘이홍주, 박천호, 김승일’이었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떼면 뭐가 되는 줄 아니? 맞아,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꽃 ‘천일홍’이 된단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서로를 향한 영원을 약속해 버렸단다. 세상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여놓은 것 같은 천일홍 꽃밭 앞에서. 영원도는 오직 우리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지. 어리석게도 젊음이란 매사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단다. 작은 걸 부풀리고 중요한 건 이유 없이 무시해 버리기도 하지. 풍선 위에 점들을 찍고 풍선을 불면, 점들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았을 거다. 우리가 속한 우주는 서서히 팽창하기 시작했고 우리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 갔어. 그렇게 우리 안에 위험하고도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은 건 바로 나였다. 승일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거든. 우리가 속해 있던 우주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어. 하지만 도저히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단다. 모든 걸 한꺼번에 망쳐 버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승일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천호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천호는 내가 승일이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 영원히 엇갈린 채로 멀어지는 별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상처받았고 굳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 일이 일어나고 만 거야. 그것도 한날 같은 장소에서. 승일이도 천호도 나에겐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단다. 그리고 둘 다 자기들이 만든 지옥 속으로 스스로 투신해 버렸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자를 함부로 범했으니까. 두 번의 잔인한 폭발, 우린 셋 다 알 수 있었지. 모든 게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는 걸. 조각난 파편들이 세 사람의 심장을 한꺼번에 찔렀지. 난 죽도록 고통스러웠지만 너를 포기할 수는 없었단다. 너로 인해 모두를 수렁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지. 한국을 떠나 너를 낳고 키우는 동안 미쳐버릴 것만 같던 시간도 서서히 흘러가더구나. 그럴수록 모든 게 선명해졌지.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네가 누구의 딸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진실은 내가 너의 엄마고 너의 천국이라는 것뿐이었지.


엄마는 죽기 전에 승일이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때의 진심을 전해 줘야 했거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겁했는지도 고백하고 싶었다. 두 사람을 다 사랑했지만 동시에 얼마나 증오했는지도.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게 되었더구나. 승일이 대신 천호가 나를 만나러 나와서 말해주더구나. 그는 오래전에 영원도의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천호는 평생토록 나와 승일이에게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고 했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도 못할 만큼.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걸 숨기고 도망쳐 버린 내 잘못이 제일 클지도 모르지. 흉측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가짜 진실에 갇혀 인생을 도둑맞은 채 살아가는 거라는 걸 그때는 몰랐단다. 승일이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벌하려 했고 천호는 그런 승일이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더구나.


엄마는 우리의 처음이 시작된 곳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단다. 이제 그만 영원도의 바닷속에 몸을 누이고 싶구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니 삶이 이토록 단순해질 수가 없단다. 시간이 가면 지나간 일들은 모두 다 잊힐 줄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만큼은 영원히 그대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이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모든 게 생생하다. 영원도와 천일홍, 그리고 바닷속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맸던 젊은 날의 우리들도. 엄마는 이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란다. 그렇게 죽을 수 있게 허락해 주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


애초에 파랑새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마구 흔들리고 숨을 내쉬면 꺼져버리는 촛불처럼. 삶은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바라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그래야만 진실의 작은 꼬투리 하나만이라도 손에 쥘 수 있을 테니까. 너는 천국이 멀리에 있지 않다는 걸 절대로 잊지 않길 바란다. 엄마는 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 속에 진짜 천국이 있었다는 걸 아주 뒤늦게야 깨달았거든. 이렇게 모두의 생을 아프게 만들어 버리고 난 뒤에야.

내 딸, 영아. 너는 제발 멀어지지 말아라. 너에게서 그리고 네 삶에서도.

사랑한다.


편지를 읽고 나서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재이 역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했다. 진실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고 가벼운 것인가. 인생이란 게 얼마나 허허로운가. 여자의 편지는 아주 많은 진실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앞은 짙은 장막으로 뒤덮여 있는 듯 묘연했다. 결국, 진실을 아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떨칠 수 없을 절망이 삶의 뒤편 어딘가에 은밀히 배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남녀의 사랑은 어긋난 채로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한 번 망가진 우주의 질서는 결코 원 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 부서진 행성의 잔해들이 우주를 떠돌면서 별과 별 사이를 하염없이 헤매기만 했던 거였다. 아주 오래고도 지루하게. 그리고 마침내 되돌아간 곳에서 만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고 참으로 허망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해 품었던 어설픈 희망과 섣부른 기대가 완전히 박살 나 버리고 난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사라진 것도 없고 찾아야 할 것도 없었다는 것을.

“여자분 따님 이름도 ‘영’이었네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우연은 아닐 거야. 아마도 나처럼 영원도에서 따 온 이름이겠지.”

“여자분은 결국 죽을 때까지도 따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셨네요.”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따님에겐 엄마가 있었잖아. 천국이 늘 함께 있었는데 뭘.”

“따님은 왜 누나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요? 아버지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걸까요?”

“그건 아닐 거야. 단지 엄마의 아름다운 한때를 한 번쯤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아닐까? 나라면 그럴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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