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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16. 2023

엄마, 나는 엄마의 딸일 뿐이야

나를 더 사랑하라

"나 암인가 봐."

"뭔 소리야, 그런 생각을 왜 해. 겨우 용종 하나 뗀 거야. 용종 떼면 조직 검사는 원래 다 하는 거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음식을 못 먹겠어. 아침에도 먹은 거 다 토했다."

"그래도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울렁거린다면 아마 식도염일 거야. 그리고 심장 시술한 지 얼마 안 되었잖아. 그게 회복되는데 3개월은 걸린다고 해. 지금은 여기저기 몸이 안 좋을 수도 있어. 이상한 생각하지 마."

"요즘 같아선 정말 죽고 싶다. 먹질 못하니 너무 힘들어."

"왜 그런 말을 해. 지금은 심장 시술 때문에 힘든 거잖아. 검사 결과 나오면 의사 선생님께서 약 지어주실 거고 약 먹으면 좀 괜찮아질 거야."



엄마는 아주 오랫동안 아파왔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 엄마에게 어떤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아팠고 챙기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도 이렇게 나이가 든 지금도 나는 엄마의 보호자이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도 엄마는 와보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되도록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말한다 한들 무관심에 상처받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몸이 아파도 마음이 힘들어도 숨김없이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결해 주기를 원했다. 늘 엄마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시소 위에서 살았다. 삶의 중심이 수시로 엄마에게 쏠렸고 나는 더 이상 내 삶이 가벼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발악했다. 어쩐지 역할이 서로 바뀌어버린 듯한 엄마와 나는 그렇게 50년 가까이 살아왔다.  


엄마에게 듣고 싶은 한 마디는 "괜찮아. 잘 지내. 걱정하지 마." 같은 말들이었다. 텔레비전 광고나 드라마 같은 데에서 나오는 흔한 엄마와 딸처럼, 딸이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꾸며서 하는 거짓말 한 마디가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한 마음이 자식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차피 세심한 나는 엄마의 거짓말을 금세 눈치챘을 테고 엄마를 돌보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게 하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죽지 못해 살았고,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라며 고통을 한껏 부풀려 말하곤 했다. 심지어 엄마가 웃고 있는 날에조차도 내게는 고통만을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말들 속에는 '너는 를 언제나 걱정하고 부담스러워해야 한다.'는 집요한 강요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길들여진 관계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여울의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를 읽다가 한참을 숨이 멎어버렸다. 나약한 부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온 자녀들을 위한 치유의 문장들 앞에서였다.


"너는 내 자식일 뿐이야. 내 감정이 네 감정일 필요는 없단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단다. 내 사랑을 얻으려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단다."

"너는 나를 보살펴왔고 나는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어. 이제 더는 그러지 말자."

"어떤 아이에게도 이건 너무 지나친 일이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 말들을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를 보듬고 위로해 주었다. 상처받은 나를 돌보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엄마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을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될지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렇게 내가 나에게 말하면서 조금씩 나를 치유하면 되는 것이니까.


엄마는 십 년째 심장병으로 투병 중이고,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대장암 수술도 다. 얼마 전엔 심장병이 악화되어 시술을 다시 고 신장까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 이젠 정말로 보살핌이 필요한 늙고 병든 노인이 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나약한 엄마가 모든 걸 버리고 떠날까 봐 두려웠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내 삶을 뒷전으로 미루고 부모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억울했다. 피해의식으로 살아온 세월의 길이만큼 나는 많이 소진되어 버렸다. 이제야 진짜 엄마의 보호자로 앞장서야 할 때가 되었는데, 지쳐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보호자인 척 연기만 하고 있었. 나의 연기에 얼마만큼의 진심이 담겨 있는지 나 자신조차 제대로 모르는 채로 말이다.

이제는 원망도 억울함도 무의미함을 안다. 지나간 과거를 다시 보상받을 수도 없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착하고 책임감 있는 외동딸이 되어 비록 그것이 보호자 연기일지라도 꿋꿋이 고통을 감내해 나가리라 다짐한다. 머리로는 받아들인 것을 가끔씩 마음이 거부하고 나설 때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힘들 뿐이다.


나의 내면아이는 상처받았고 살면서 그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죄책감을 느꼈고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면서는 왠지 억울했다. 두 지점을 오가기만 할 뿐 나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엄마를 사랑해 왔다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는 없다. 모든 자식들이 그러하듯 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엄마의 나약함과 부족함은 어쩔 수 없는 내 삶의 짐이었고 그 짐이 버겁고 싫더라도 나는 끝끝내 내려놓거나 던져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야 그런 내가 참으로 대견하고 예쁘다. 상처로부터 도피하는 게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그저 상처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깨우쳐 나가는 게 필요할 뿐이다. 때로는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덧나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게 될지라 그러한 나의 모습조차 스스로 사랑할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오늘은 엄마에게 용기 내어 고백해 본다.


'엄마, 나는 엄마의 딸일 뿐이야.

엄마가 지키고 보살펴 주어야 하는 엄마의 딸 말이야.

나는 내 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라고 매일매일 말해 주고 있어.

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

엄마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지.

엄마, 미안해.

어쩌면 나는 그동안 엄마를 거짓으로 사랑했던 것일지도 몰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겠어?

이제라도 나를 더 사랑해 볼게.

설마 서운해하는 건 아니지?

엄마, 나는 엄마의 딸일 뿐이잖아. 맞지? 그렇지?'


물론 이 고백은 나 혼자만의 독백이다. 그리고 이 메아리 없는 독백이 오늘도 한 뼘씩 내 마음에 내가 들어갈 자리를 키우고 내 가슴에 나에 대한 사랑이 채워질 공간을 키울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나 자신을 사랑해 가면 된다.


원작  Boyana Petkova,  모작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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