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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18. 2023

나에겐 하늘이 있었어요

박노해의 '하늘을 보는 소년'

하늘을 보는 소년


박노해


가난이 서러울 땐 하늘을 보았어요

죽은 아빠가 그리울 땐 하늘을 보았어요

엄마가 아픈 날엔 하늘을 보았어요

억울하고 따돌림당하고 외로운 날엔

홀로 먼 길을 돌아가며 하늘을 보았어요

기러기떼 울며 나는 가을날이면

나만 홀로 남겨진 듯 하늘을 보았어요


나는 하늘을 보는 소년이었어요


철야 노동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새벽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았어요

군홧발에 짓밟힐 땐 눈을 감고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았어요

동지들이 죽어간 날에도

영혼의 총을 들고 하늘을 보았어요

감옥에서도 그 작은 창살 너머로

파란 조각하늘을 보았어요

실연하고 실패하고 또 패배한 날도

검은 구름 사이로 하늘을 보았어요

사막과 광야와 지구의 끝을 걸을 때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았어요


난 하늘을 보는 소년이었어요


하늘을 담은 눈으로 세상을 보았어요

하늘에 비친 눈으로 그대를 보았어요

하늘이 보는 눈동자로 나를 보았어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에겐 하늘이 있었어요

하늘이 눈에 담은 내가 있었어요

오늘도 난 하늘을 보는 소년이에요


무아



내게는 박노해 님의 인생과 같은 엄중한 서사가 없다. 군홧발에 짓밟힌 날도 동지들이 죽어간 날도 감옥에 갇힌 날도 없었다. 사막과 광야를 걷는 순례자의 고행에 몸을 던진 적도 없었다. 나는 나라는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온전히 감당해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많은 소소하고도 시시한 사적 인간일 뿐이다. 역사와 국가와 정의 앞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렇고 그런 한 사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시가 내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보면 내게도 시 속의 소년처럼 하늘을 바라본 순간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만 고이 담아 둔 말 못 할 하늘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떨어지려던 눈물이 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고꾸라지기만 하던 몸뚱이가 조금은 펴지기도 한다. 하늘을 보느라 젖혀진 가슴너비만큼 내 폐도 넓어져서 막혀 있던 숨길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도 든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앞산의 소나무와 하늘을 수시로 바라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숨도 조금은 더 깊고 커지는 듯하다. 


사는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던 날들은 주로 언제였을까? 서럽고 원망스러운 날, 죄책감에 움츠러들던 날, 절망 속에 몸부림치던 날, 그리움에 가슴 시린 그런 날들이었다. 기쁨에 찬 눈, 행복에 겨운 가슴은 하늘을 찾지 않았다. 하늘을 찾는 날은 무엇을 해도 견디기가 힘든 아픈 날들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히 파랗고 곱고 맑았다. 까맣고 어두워 별이 총총총 빛나기도 했다. 하늘은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늘을 보면 세상사 어떤 일도 작고 보잘것없어졌다. 나란 사람의 인생사 따윈 작은 모래알처럼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하찮은 모래알이 고통스러워봤자 얼마나 고통스럽냐며 꾸짖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꾸짖음은 묘하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하늘을 담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하늘처럼 의연해질 수 있었다. 이따금 고통에 이성을 잃으면 무심하게만 보이는 하늘에 대고 욕을 해대기도 했지만, 미동도 않는 하늘에 그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조용히 무르고 그저 하늘을 담은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기로 했다. 하늘에게서 위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 것이다. 박노해 님의 '하늘을 보는 소년'은 하늘을 보는 소년이자 스스로가 하늘이 된 소년의 이야기가 아닐까. 끝끝내 스스로의 삶을 희망하고 그 가여웠던 희망을 하늘처럼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시 펼쳐 보여주면서 말이다.  


지극히도 사적인 삶이지만 하늘을 닮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시로 쓴 적이 있었다. 나에겐 늘 하늘이 있었다. 그 하늘이 나를 키웠고 살렸고 지금을 살게 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는 내 눈에 세상 모두를 담기 위해.



https://blog.naver.com/hajin711/222995336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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