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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25. 2023

익숙한 사랑과 낯선 사랑, 당신의 선택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몇 달 동안 읽기를 벼르던 소설이 있다. 그럼에도 좀처럼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저 이 소설을 가슴 한 편에 품어두고만 지냈다. 마치 때가 되어야만 읽을 수 있는 통과의례라도 되는 것처럼. 따스하다기보다 무더운 5월의 어느 날 오후, 순천의 한 서점에서 그 때를 만났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책장 한 편을 가득 채워놓은 90년대 느낌이 가득한 오래된 지역 서점. 나는 거기에서 비로소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집어들 수 있었다. 책이 어떤 길로 내게 오느냐도 중요하다. 그것은 책과의 첫 만남이며 그 만남을 시작으로 앞으로의 인연도 흘러갈 것이기에. 나는 왜 이 소설을 읽지 못하고 망설여왔을까? 운명 같은 누군가를 만날 때처럼, 사강이 나를 매혹하고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어놓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사강이 스물 네 살에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랑에 대한 남녀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고 흡입력이 있다. 20년을 40년처럼, 아니 50년처럼 살아낸 그녀의 격정적인 삶 때문이었을까. 난해하고도 모호한 사랑이란 감정, 잡히지 않는 그 감정의 실체를 어쩌면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여주인공 폴은 서른아홉이다.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리지만 어쩐지 나는 폴에게 깊이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 감정은 늙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여자이기를 바라는, 중년 여성의 몸과 마음을 지독하고도 잔인하게 대변해 주고 있었으니까.


폴에게는 오래된 연인 로제가 있다. 하지만 그는 온전히 폴의 것이 아니다. 때때로 창녀를 만나거나 젊은 여자를 취하는 그를 보면서도 폴은 모르는 척해준다. 사랑의 무게 중심이 로제에게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 기형적인 관계이건만 폴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고독과 허무가 그녀를 잠식해 가는데도 그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고 느낀다. 폴은 그런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할퀴고 핥아가며 무기력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로제는 폴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로제에게도 폴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자이다. 하지만 로제는 폴 곁에만 머무르는 것을 불안해한다. 구속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로제는 사랑에 불성실함으로써 자신만의 사랑을 지키려 한다. 둘은 서로에게 티 내지 않으면서 애매하고도 위태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폴과 로제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난다. 아름답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젊고 잘생긴 변호사 시몽. 시몽의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이다.


시몽은 첫눈에 폴에게 반하게 된다. 미숙한 젊음 때문인지 타고난 몽상가적 기질 때문인지 시몽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맹목적으로 폴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는다. 그런 시몽 앞에서 폴은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시몽이 폴에게 한 질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브람스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기에 브람스 연주회에 초대할 때면 꼭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는 게 예의라고 한다. 둘은 브람스 연주회에 함께 가는 것으로 만남을 시작하게 되고 짧지만 격정적인 사랑의 불장난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물론 불장난이란 표현은 폴에게만 한정된 것이고, 열정적이고 순수한 시몽은 영혼을 다 바쳐서 사랑에 충성하려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는 재미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제목인 것이다. 사강이 제목에 반드시 점 세 개로 끝나는 말줄임표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왜 말줄임표가 세 개여야만 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상대의 감정이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하고도 난해한 사랑에 대한 세 사람의 물음을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세 사람의 사랑에 대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응축하고 있는 표현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시몽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사람이었고, 폴에게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였다. 사랑만 있다면 그 밖의 것들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전형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시몽은 폴의 사랑을 쟁취하고 나서도 폴이 떠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사람들이 시몽과 폴을 보며 뒤에서 수군거렸기 때문이다. 나이 든 여자와 잘 생긴 젊은 남자의 조합은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폴은 그러한 현실에 불편함을 느꼈고 시몽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폴에게 더 큰 불안을 느꼈다. 폴은 지독하게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시몽을 통해 사랑의 로망과 환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폴에 대한 집착이 생길수록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초라함과 초조함도 함께 커져갔다. 폴은 자신을 숭배하는 한 남자의 열정적인 사랑에도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나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미남이 저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다가온다면? 당연히 처음엔 그 사랑의 진위를 의심할 거고 사랑을 확인한 뒤에는 깨질까 봐 불안해할 것이다. 능력 있고 잘 생긴 젊은 남자를 거부하는 나이 든 여자. 과연 복에 겨운 걸까? 사랑은 그렇게 단순하게 머릿속으로만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폴이 시몽과 헤어지고 다시 로제에게로 돌아가는 결말이 내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완벽한 사랑을 꿈꾸면서 서서히 영혼이 말라비틀어지느니 차라리 조금은 비어 있는 사랑 속에서 외로운 것을 택하리라. 로제도 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되돌아가지만, 그 사랑의 형태가 바뀌지는 않았다. 로제에게 폴은 자신을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익숙하고 편안한 사랑일 뿐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시몽은 하룻밤 꿈이나, 신기루 같은 존재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이 청년은 시종일관 사랑에 헌신하고 사랑으로 고통받는다. 그는 스물다섯 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아닌가. 시몽도 폴이나 로제처럼 나이가 든 후엔 사랑의 방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나 역시 이제는 모든 걸 내어 던지는 사랑을 하기엔 조금 늙었다는 기분이 든다. 폴이 시몽과 헤어지면서 했던 마지막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그럼에도 5월의 어느 늦은 오후, 햇살을 머금은 살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시몽처럼 낯설고 황홀한 사랑이 내게도 와준다어떨까 하고 꿈꾼다. 한때 시몽이었던 나는 이제 폴이 되었고 로제가 되기도 하면서 점점 더 늙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어때요?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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