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받아들이기

삶에서 길어 올린 단상들 1

떠남,

살면서 수도 없이 반복해 온 것.

사람을 떠나고 물건을 떠나고 장소를 떠나온 숱한 기억들.

조금은 눅눅하고 퀴퀴한 기억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그, 그것들 그리고 거기.

그 모든 '떠남'에 대하여 밤이 깊도록 나의 생각도 깊어져간다.

사는 동안 나는 늘 가볍게 떠나는 사람이었다.

떠나는 게 아무렇지 않아서 스스로를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경멸하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면 냉소적인 척하는 것만이 나약한 나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던 게 아닐까?

나는 나를 아주 교묘히 속이면서까지 내 삶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쳐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떠남'에는 거역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변명들을 늘어놓으며, '떠남'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지 않으려 회피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떠남' 전과 후의 인생에는 미세하게 아니면 거대하게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떠남'을 담보로 하여 얻어지는 부채 같은 것이었다.

'떠남'에는 늘 대가가 따랐고, 그 대가는 일생 동안 갚아야 할 줄어들지 않는 이자였다.

'떠남'이 결과적으로 행복을 향해 있든 불행을 향해 있든, 치러야 할 대가는 언제나 비슷했다.

며칠 뒤면 나는 또 떠나야 한다.

사람을 떠나고 물건을 떠나고 장소를 떠나야 한다.

'떠남'을 앞둔 이 순간에도 나는 두렵거나 아쉽거나 설레지는 않다.

다만 '떠남'이란 단어를 마치 태어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대하는 것처럼 몇 날 며칠 동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전에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말과 행동이 조금씩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나인데 예전 같지 않은 나를 만나는 생경한 경험, 그런 순간에 느껴지는 나와 나 사이의 서걱거림.

나이가 든다는 건 젊은 시절의 가벼움, 명랑함, 무모함을 조금은 잃어버리는 것이다.

약간의 무거움, 우울함, 책임감을 안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때가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떠남'에 대한 느낌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떠남'의 이유에 대하여 애써 나를 속이거나 포장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고, '떠남' 그 자체에 거창한 의미를 붙이지 않게 되었으며, '떠남'의 결과에 대한 설렘이나 두려움도 크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다만 나는 정말이지 '떠남'이란 것을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진실로 모든 '떠남'은 어려우리라.

내가 사랑한 사람, 아끼는 물건, 정든 장소를 떠나는 것은 마음이 힘든 일이다.

과거의 나처럼 가볍게 떠나려는 것이나 반대로 무거운 의미를 덧붙이려는 것은, 둘 다 자의식의 과잉이나 자아도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일종의 허세라는 말이다.

그냥 담백하게 '떠남'을 응시하자.

슬플 땐 슬퍼하고 아쉬울 땐 아쉬워하고 덤덤할 땐 그냥 덤덤하자.

아직도 내 삶에 남아 있을 숱한 '떠남'들에 대하여

섣불리 판단하지는 말자.

자신만만해하지도 죄스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자.

그냥 해석하지 않는 '떠남'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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