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길이 만나 사람과 사람을 잇다

by Elizabeth Kim


나이아가라 절벽 위를 따라 걷다 보면 늘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가는 어딘가에,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흙길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또 다른 길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여행작가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길을 따라다니다가 그 상상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프렌드십 트레일(Friendship Trails)이라는 이름도 아름다운 개념 하나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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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하늘 아래, 같은 마음으로

자매도시(Twin Towns)가 행정 지도 위에서 맺는 약속이라면, 프렌드십 트레일은 흙 묻은 등산화끼리 나누는 포옹에 가깝다. 서로 다른 나라의 트레일들이 "우리, 친구 하자" 하고 손을 잡는 특별한 연결고리다. 이 글로벌 연결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월드 트레일 네트워크(World Trails Network, WTN)다. 트레일과 길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서로의 길을 소개하고, 함께 걷는 문화를 키우는 연대 조직이다. 프렌드십 트레일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이커들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지역 사회는 관광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무엇보다 국경을 넘어선 '걷는 문화'의 확산이라는 더 큰 그림이 그려진다.




제주 섬에서 시작된 작은 혁명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세계적인 발상이 의외로 작은 섬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남쪽 바다 위에 떠 있는 화산섬, 제주도. 돌담과 귤밭, 바람 부는 해안 절벽과 오름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두르는 400km가 넘는 제주올레길. 이 길을 만든 제주올레재단이 세계 최초로 프렌드십 트레일을 제안했다. 섬의 좁은 올레가, 세계의 넓은 길들과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지금 제주올레가 친구로 부르는 길들을 보면 놀랍다. 영국의 코츠월드 웨이(Cotswold Way), 이탈리아의 친퀘 테레(Cinque Terre), 일본의 시코쿠 오헨로(Shikoku O-henro), 호주의 비벗먼 트랙(Bibbulmun Track), 그리스의 시프노스 트레일(Sifnos Trails), 스위스 하이크(Swiss Hike), 레바논 마운틴 트레일(Lebanon Mountain Trail), 대만의 랑쿠스 셀루(Rankus Selu) , 그리고 내가 사는 캐나다의 브루스 트레일(Bruce Trail Conservancy)까지, 아홉 개 나라의 길이 제주 바람과 함께 숨 쉬고 있다.




우리가 처음 손잡은 의미

내가 사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단체, 브루스 트레일 보존협회(BTC)는 바로 제주올레와 가장 먼저 친구가 된 곳이다. 2011년, 두 길은 서로를 '쌍둥이 트레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온타리오의 칼레돈 힐스(Caledon Hills). 호클리 밸리(Hockley Valley)의 숲 사이를 파고드는 10km 남짓의 더블 루프 트레일! Tom East, Isabel East, Glen Cross 사이드 트레일과 브루스 트레일 메인 구간이 얽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능선과 계곡들. 그리고 제주 동쪽, 제주올레 2코스. 광치기해변에서 온평포구까지 이어지는 15km. 두 개의 오름을 오르내리고, 전설이 서린 '혼인지'를 스치며, 돌담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길. 풍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두 길의 리듬은 묘하게 닮아 있다. 하나는 나뭇잎 사이로 새소리가 떨어지고, 하나는 파도 소리와 바람이 동행한다. 그러나 둘 다 "천천히 걷자"라고, "생각 좀 해보자"라고, 조용히 속삭이는 길이다.




캐나다 브루스 트레일의 꿈을 완성한 2017년

BTC는 2017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한 가지 로맨틱한 목표를 세웠다. 브루스 트레일을 이루는 9개 클럽 모두에게 세계의 '절친'을 하나씩 만들어 주자는 것. 그리스의 키티라 하이킹과 마지막 손을 맞잡던 5월의 어느 날, 그 목표는 완성됐다.


지금 브루스 트레일이 친구로 부르는 길들을 보면 지도 위의 선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대륙을 가로지른다. 남아프리카의 Rim of Africa, 대만의 Mountains to Sea Greenway, 영국의 Cotswold Way와 South West Coast Path, 호주의 Bibbulmun Track, 브라질의 Transcarioca Trail, 코스타리카의 Sendero Pacifico, 레바논의 Lebanon Mountain Trail, 그리스의 Paths of Greece, 그리고 첫 친구 Jeju Olle까지.




내가 걷는 길이 세계로 이어지는 순간

나이아가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내가 걷는 한 걸음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브루스 트레일의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걸을 때, 어쩌면 제주 어딘가의 해안길에서는 누군가가 같은 로고가 새겨진 표지판을 지나며 전혀 다른 하늘 아래, 같은 네트워크의 일원이라는 기묘한 동지애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프렌드십 트레일은 길의 이야기를 빌려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세계는 여전히 넓고, 뉴스는 자꾸만 우리를 갈라놓는 것 같지만 길 위에 서면,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비슷해진다. 같은 무게의 배낭을 메고, 비슷한 소재의 양말을 신고, "얼마나 남았지?"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발을 옮긴다.




오늘도 집을 나서며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지도에는 여전히 국경선이 진하게 그어져 있지만, 길 지도 위에서는 이미 선들이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문장처럼 이어져 있다. 비록 몸은 이곳 나이아가라에 있지만, 길 위에 선 우리는 이미 세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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