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노마드의 불씨
대학에서 영어 회화 수업을 수강하였다. 선생님은 주디 로페즈(Judy Lopez, 이하 주디)라는 분으로, 그 당시 43세의 중년이셨다. 그분은 사람을 신분이나 경제사정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멋진 분이셨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식을 가지고 사는 지식인이시다. 그런 삶의 태도가 내게도 영향을 끼쳤다. 현재까지도 미국 맘(American mom)으로 여기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 계신 엄마와 다름없이 소중하다.
주디와 나는 한국에서 수업 외에도 많은 경험을 공유했다. 함께 여행도 가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방학 때마다 주디 집에서 살기도 했다. 주디는 미국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려면, 경험 가득한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듣는 것이 최고라 하셨다. 주디의 추천으로 용산과 송탄 미군 부대에서 진행하는 옷 만들기, 에어로빅, 영어 강의 등의 클래스를 들었다. 엄마처럼 모든 수업 과정을 함께해 줬다. 그 친절에 너무나 감사하다.
미군 부대 경험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지금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잔디가 깔려 있는 마당과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는 일은 미군 부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이었다. 주디와 그의 남편 스티브 덕분에 장교만 출입 가능한 장교 클럽(Officer's Club)에서 가끔 맥주와 와인을 마시고 밥도 먹었다. 또한 10월에 있는 옥토버 피스트(October Feast) 맥주 축제 같은 다양한 문화축제도 참여할 수 있었다. 주디와 함께 이태원에 있는 다양한 국가 음식과 문화를 체험하면서 서서히 외국 문화에 익숙해졌고 훗날 캐나다 식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급기야 일이 커져 둘이 함께 대학교에서 강의실을 빌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회화 수업을 만들었다. 나는 보조를 하면서 회화를 도왔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는데 인기가 많았다. 계속 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이 많아 꾸준히 진행했다.
주디 역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마다 내가 받은 만큼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당시 주디는 최재성, 채시라 주연의 <여명의 눈동자>라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셨다. 어느 날 서점에서 여명의 눈동자 소설책을 발견했다며 읽어보고 싶다고 영어로 번역을 부탁하셨다. 걸음마 수준이었던 영어 실력이라 한 줄 번역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곤 했다. 소설 첫 페이지에 나오는 ‘덜커덩’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몇 시간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이 일은 내가 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훗날 한국에서 대학원 다닐 때 번역으로 수입을 벌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주디를 통해 풍요와 행복을 느꼈고 내게 온 인연을 소중하게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주디와의 만남 덕분에 수많은 인연들을 감흥 없이 스쳐지나 보냈던 내가 캐나다에선 모든 인연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