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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Oct 20. 2022

엄마, 나 아이돌이 될 거야.

소은이의 꿈

S: 엄마, 나 아이돌이 될 거야.


 소은이의 꿈이 바뀌었다. 엄마 쭈쭈를 고쳐주는 의사에서, 멋진 춤을 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가수로. 유치원에서 아이돌 댄스 특강을 들은 후 소은이는 요즘 매일 언니들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하기 바쁘다. 유방암을 진단받고 1년 6개월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 엄마가 아팠다는 기억은 아이에게 없는 걸까. 나는 그게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소은이가 의사의 꿈을 벌써 저버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아픈 엄마 딱지를 뗀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내심 아이가 의사의 꿈을 계속 이어가길 바랬던 걸까? 좀 더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에게 한번 더 질문을 던져보았다.


M: 정말? 소은이 나중에 의사 선생님 되어서 엄마 쭈쭈도 고쳐주고, 안 아프게 해 준다고 했잖아.   

S: 응, 의사 선생님도 되고 아이돌도 될 거야.

 

 되고 싶은 꿈은 많을수록 좋으니 아이돌도 나쁘지 않다. 그래도 이제 다섯 살인데 벌써부터 아이돌이 되고 싶다니 참 빠르기도 하지. 의사도 되고, 아이돌도 된다면 그야말로 슈퍼우먼이겠군!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에게 별생각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M: 그렇구나. 그래, 의사도 되고 아이돌도 되어서 엄마 집도 사 주고 차도 사줘.

S: 응! 엄마는 보리차 사줄게.


 보리차라니! 진지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은 아이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소은아, 엄마가 말한 차는 그 차가 아닌데.


S: 그리고 아빠는 회사에서 일 안 하게 만들려고 내가 일할 거야.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아이 말에 놀랐다. 본인이 일을 해서 아빠를 쉬게 해 주겠다니. 어린 아이의 마음이 기특하고 갸륵하다. 당사자인 남편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감동했을까. 아이는 아빠가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어쩌면 아빠가 아침 일찍 나갔다 저녁에 들어오는 삶이 소은이의 눈에도 고단해 보였을까. 아니면 아빠와 놀고 싶은 마음 반영되어 나온 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아빠가 회사에 가지 않으면 자기와 하루 종일 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어찌 되었든 다섯 살 딸아이가 아빠를 위해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소은이의 말대로 소은이가 아이돌 가수가 되면, 남편도 직장을 퇴직할 수 있을까. 엄마가 던진 농담처럼, 소은이의 힘으로 부모에게 집도 차도 사 주는 날이 올까?


 나는 이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물질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단단해졌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암을 진단받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딸아이의 미래에 나의 존재가 없어지는 일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갈 때, 내가 아이 옆에 있지 못할까 봐 숨죽여 울던 지난날. 딸이 결혼할 때 엄마가 없을까 봐 불안했던 끔찍한 상상들은 이제 모두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나도 다른 부모들처럼 평범하게 아이의 장래를 그려보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나는 소은이가 의사가 되든, 아이돌 가수가 되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란다.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공부로 인해 힘들지는 않았으면 한다. 치열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 나로서는, 아이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감사한 일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우리 부모님 생각이 났다. 60대 후반에 아직 회사에 다니고 계신 아빠께 나는 한 번이라도 소은이와 같은 말을 해본 적이 있던가. 심지어 나도 여태껏 부모님께 집도 차도 사 드리지 못하면서, 소은이에게 이런 농담을 하다니 마음이 뜨끔했다. 물론 물질적으로 잘해드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겠지만, 부모님의 삶을 윤택하게 해 드릴 수 있다면, 더불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효도일텐데. 나는 부모님께 얼마나 효도를 실천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여지껏 부모님이 나이 드셨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부모님은 젊고, 건강하실 거라는 생각에 부모님 사랑을 받을 생각만 했지, 어떻게 그 사랑을 갚을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내 자식 키우기에 바빠서 마음처럼 부모님을 챙겨드리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요즘 소은이의 말과 행동을 보면 다섯 살 꼬맹이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커서 어른이 되면 엄마에게 가방이나 화장품을 사주겠다는 소은이. 내가 딱히 가방이나 화장품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봤을 때 그런 것들이 예뻐보이고 좋아보이나 보다. 아이의 귀여운 약속에 웃음짓다 갑자기 친정 부모님 집에 있는 부부 커피잔 세트가 떠올랐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그려진 커피잔. 언니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부모님께 드린 선물이다. 우리는 어버이날을 맞아 용돈을 모아 동네에 있는 선물의 집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선물을 골랐다. 커피잔 속에 웃고 있는 엄마, 아빠처럼 두 분이 화목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벌써 30년도 더 지난 커피잔에는 그렇게 우리 가족의 추억이 아련하게 담겨 있다. 엄마는 지금도 혹시나 커피잔이 깨질까봐 찬장에 고이 모셔두고, 특별한 날에만 꺼내 쓰신다고 했다. 이 말씀 하나에 엄마가 얼마나 이 커피잔을 아끼시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부모님께는 지금 내가 사드리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모아 사드린 이 커피잔이 소중할지도 모른다.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우리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물건이기에. 

꼬꼬마 시절, 언니와 내가 부모님께 선물한 추억의 커피잔

 

 자식이 먼 훗날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면 그도 좋겠지만, 부모에게 그보다 더 값진 선물은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 아닐까? 나는 아이돌 가수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라서, 엄마께 집과 차(car)를 사드릴 수도, 아빠께 일을 그만두시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소은이가 말한 차(tea, 茶)는 몇 번이고 당장 사드릴 수 있지 않은가. 주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예쁜 카페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사드리며 부모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부모님께 말씀만이라도 드려봐야지. 내가 몇만 부 책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엄마 집도 사주고 차도 사 드린다고! 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실제로 꿈을 이뤄서라기 보다, 꿈을 꿀 때 행복한 것이니까. 비록 그런 꿈을 꾸기에 내 나이가 많고,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적기 하지만 꿈을 꾸는 데는 제약도, 안 되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내가 아직 꿈과 희망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은이가 나에게 그렇듯, 나도 부모님께 그런 빛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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