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에 걸리고 암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열 명이 넘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언젠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던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 바로 처음 내 가슴에 혹이 생겼을 때, 맘모톰 시술을 해주셨던 유방외과의 원장님이다. 방송에도 많이 출연하셔서 이름만 대면 여러 사람이 알 만한 유명한 분이었고, 맘모톰 시술 때에도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셔서 잠깐이지만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구나.' 생각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맘모톰 시술을 받은 걸 후회했기에 그 뒤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는 지금까지 후회로 남는 부분이다. 3개월 뒤 내가 병원에 다시 갔다면 분명 원장님은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맘모톰 시술을 권하신 분이니 아마 이번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밀려오면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가도 '애초에 맘모톰 시술을 안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의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와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었다. 맘모톰 시술을 할 필요가 없는 데 굳이 맘모톰 시술을 한 것 자체가 어찌보면 과잉 진료이며, 그로 인해 암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모든 맘모톰 시술 환자가 나처럼 되는 것도 아니니 사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을 안다. 관계가 있다고 증명할 수 없지만 관계가 없다고도 확언할 수 없는 문제. 결과를 따졌을 때 과연 그 선택이 옳았을까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만나 그때의 선택에 대해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처럼 맘모톰 시술을 하고 바로 혹이 생기는 경우가 다른 환자에게도 있었는지 궁금했고, 훗날 암이 될 녀석을 가장 먼저 목격했던 의사 선생님의 증언을 듣고 싶기도 했다.
1년 4개월 만에 다시 만난 당신의 환자가 암환자가 되어 나타나자, 원장님은 안타까운 내색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며, '그때 그것이 암이었다니...'하고 같이 황당해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상식적으로 초음파에서 2mm~3mm 되는 작은 것도 발견하는데 (맘모톰 시술 전에 )1cm의 혹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봐서는 (맘모톰 시술 후에) 있는 거니까 차라리 내가 못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원장님은 없던 혹이 생겼다고 보기에는 너무 황당하니 차라리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혹이 그렇게 빨리 생길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는 "암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냥 최선의 치료를 받았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해라. 알려고 하지 마라. 다친다. 평범하게 살아라. 나도 모른다."라며 솔직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원장님이 겪었던 두 명의 환자 사례를 말씀해주셨다. 한 달 전 검사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던 환자가 갑자기 커다란 종양이 생겨 암 진단을 받은 이야기, 2년 동안 혹의 크기가 변함이 없어서 양성 혹이라고 생각했던 혹을 우연한 기회에 제거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암이었다는 사례. 결론은 '암은 정말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이신 한 마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원래 있었던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들, 아니면 정말로 혹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생긴 것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암에 대해서는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파고드는 것보다 앞으로 즐겁게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암에 대해 최고의 지식을 갖고 있는 의사 선생님도 모른다는 데 내가 그걸 알려고 아등바등 살았으니, 그동안 나는 얼마나 힘들었겠나 싶어 맥이 풀리면서도 원장님의 그 솔직함과 털털함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순간 그동안 엉켜있던 마음의 실타래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나는 아직 담낭에 있는 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조금 더 민감하게 암의 원인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원장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담석이 증상이 없으면 사일런트 스톤(silent stone) 즉, 조용한 돌이니 그냥 내버려두어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 아프면 떼도 늦지 않다. 관찰하다가 1.5~2cm 정도 크기가 커지면 증상이 없더라도 수술할 생각을 하면 된다. 지금은 유방암 치료에 집중하고 당장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얼마나 명쾌한 답변인가. 환자는 의사의 주관적인 견해가 궁금한 데 많은 의사들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객관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 정말 좋은 의사는 환자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넘어 자신의 생각을 말해줄 수 있는 의사 아닐까? 물론 의사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환자에게 매 순간 진심을 다하는 의사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신과 경험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방향은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원장님은 곧바로 메모지를 꺼내서 내게 꼭 먹어야 할 영양제들을 적어주셨다. 너무 많은 영양제를 추천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영양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위해 추천받은 영양제를 살짝 언급하면필수로 복용할 것으로 종합비타민, 비타민C, 비타민D를 추천하셨다. 그리고 오메가 3, 유산균, 칼슘 마그네슘은 선택에 맡긴다고 하셨다.
결국 영양제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의사가 10명이라면 추천하는 영양제 리스트도 10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의사든 약사든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양제가다르므로결국 자신이 믿는 의료진을 정하고, 영양제도 소신껏 복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이 확신을 갖고 영양제를 먼저 추천해주시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배려가 그저 반갑고감사할 따름이다.
이어서 면역치료에 대해서도, 식단에 대해서도 견해를 말씀해주셨다. 특히 식단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토마토가 좋다고 평생 토마토만 먹을 거냐. 가지가 좋다고 가지만 먹을 거냐. 아무리 좋은 음식도 한 가지 음식만 계속 먹으면 질려서 못 먹는다. 암에 좋은 음식, 암에 나쁜 음식도 특별히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이 행복한 것이 제일이다."
기억할지 모르겠다. 처음 진단을 받고 대학병원에 갔을 때 주치의 교수님이 내게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가리지 말고 먹고 싶은 것 잘 먹으라고. 그때는 그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9개월이 지나고 보니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암에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분들이 말씀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좋은 식단도 마음가짐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 아니었을까? 실제로 식단을 아무리 잘 지켜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돌고 돌아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마음이 편안한 것,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그 말이 의미 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마침내 정점을 찍은 한 마디.
"공부하지 마라. 좋아하는 음식 먹고, 좋은 옷 사 입고, 여행 다니며, 즐거운 생각만 해라. 우리 어차피 100년 뒤에는 다 없다. 뭘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
이 말을 듣는데 갑자기 진료실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도, 수술을 할 때도, 항암을 안 하게 되었을 때도, 의사 선생님 앞에서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 없던 내가. 어차피 100년 뒤에는 다 없다는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 왜 눈물이 났던 걸까? 그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섞인 눈물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했던 나 자신이 불쌍하기도 했고, 허무하기도 했다. 어차피 100년 뒤에는 모두 죽고 없는데 뭘 그리 힘들어했을까. 한편으로 나 뿐만 아니라 100년 뒤에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 할 필요 없겠구나. 그냥 주어진 하루를 즐겁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대화를 하며 마치 그동안의 치료과정을 총망라하여 마지막 편을 찍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안타까워하는 원장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100년 뒤에는 아무도 없다는 그 말이 그동안의 고민과 번뇌를 종식시킨 것이다.
방사선 치료를 막 마치고 한참 유방암 공부에 빠져 있을 때 진단을 했던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공부하지 말라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결국 돌아보면 모든 의사 선생님들이 방식이 다를 뿐 내게 같은 조언을 하고 있었구나. 어쩌면 그동안 그것을 받아들일 내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던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 동안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원장님은 마음을 참 편하게 해 주시네요."
나는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채로 이렇게말했다.
"면역이 뭐야? 마음 편하게 먹는 게 면역이야.
불안해하지 말고 편하게. 궁금한 거 있으면 또 보러 와요"
진료실을 나서며 나는 그동안 마음에 묻어두었던 오랜 숙제를 해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매듭을 묶은 곳에서 매듭을 푼 것 같은 느낌.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속이 후련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의사선생님과의 이런 감정적인 소통이 나 같은 환자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깨달았다.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내 마음을 들여봐 주신 원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나는 유방암 치료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내가 유방암에 관한 에세이를 책으로 낸다고 하자 누군가는 말했다.
"환자 에세이? 어차피 다 자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잖아."
그렇다. 이 이야기는 유방암에 걸려 힘들었던 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힘들었음을 토로하려고 쓴 이야기는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다른 유방암 환우들이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었구나.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하고위로받길, 그리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좀 더 먼저 유방암을 경험한 환자로서, 치료 과정뿐 아니라 심리의변화까지 전할 수 있다면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가족 또는 지인 중에 유방암 환자가 있다면 "환자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구나, 이런 치료를 받게 되는구나." 미리 짐작할 수 있었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유방암과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이 책을 보게 된다면 부디 경각심을 갖고 자신의 건강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이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 것 같다. 살다 보면 어쩌면 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방암과 관련하여 더는 새로운 이야기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작용도, 재발도, 전이도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 그것이 나의 소망이자 모든 환자들의 소망일 것이다.
유방암, 이젠 정말 안녕!
(photo by mattbotsford on unsplash)
그 동안 저의 유방암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이 편을 마지막으로 유방암에 대한 글은 마칠까 합니다. 지난 번 딜레마 편을 읽고 출판사 선정에 조언주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출판사를 만나 실용서와 에세이가 합쳐진 '건강에세이'가 세상에 나올 예정이에요. 많이 기대해주시고, 사랑해주세요.♡
못다한 이야기는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계속 나누어요! 네이버 블로그는 아직 활발하지 않지만 앞으로 정보성 글을 위주로 천천히 꾸려보려 해요. 인스타그램에서는 식단, 운동과 같은 암환자의 일상을 자유롭게 올리고 있어요. 보다 활발한 소통이 가능하니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