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진경 Feb 07. 2022

암환자의 재능기부

암환자도 남을 도울 수 있어요!

 유방암을 진단받은 지 어느덧 9개월이 지났다. 교무실에서 수화기 너머로 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표준치료도 끝나고, 이렇게 일상을 회복하여 지금은 나름대로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암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책도 읽고, 글도 써보고, 다른 새로운 일에 몰입도 해보고, 참 바쁘게 살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새롭게 도전하는 일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암을 진단받고 치료하는 과정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알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마흔을 앞두고 새롭게 발견한 '나'의 모습. 국어교사가 아닌, 소은 엄마가 아닌, 그냥 '나'로 존재하며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는 과정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궁금한 건 꼭 해결해야 하는 사람.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오죽하면 친정 부모님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제발 좀 쉬라고 당부를 하셨을까. 그런데 나는 그 사이 또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다. 그것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얼마 전 어느 출판사 대표님과 소통을 하게 되었다. 그곳은 암경험자만을 위한 출판사로 암환우가 직접 글을 쓰고, 암환우들의 재능기부로 책을 발행하고 있었다. 출판사 대표님도 유방암 환우였고, 출판사업 외에도 환우들을 위한 재능기부, 후원 등 여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계셨다. '암환우는 암환우가 돕습니다.'라는 슬로건이 마음에 와닿았다. 대표님의 선한 영향력을 보며 '세상에 이렇게 뜻이 있는 사람도 많구나.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직은 따뜻하구나.' 마음이 뭉클해졌다. 훌라 강사는 훌라를, 뜨개질 강사는 뜨개질 자조모임을 통해 암환우의 힐링을 돕고 있었다. 최근에는 메이크업 전문가와 사진 촬영 전문가들이 모여, 암환우 메이크오버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사진 작품들이 어느 한 지역의 미술관에 전시되는 걸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델처럼 아름다운 분들이 모두 암 환우라니.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암 환우들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찾아가며 정서적인 치유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암환우가 판매하거나 암환우가 써도 되는 좋은 제품들을 구성하여 프리마켓을 열기도 하고, 암환우의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 고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거의 유방암 환우들과만 소통을 하며 지냈는데,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이 세상에는 더 많은 암환우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조금이나마 이 선한 나눔 행렬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본업은 국어교사이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5살 아이 엄마.' 지금의 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면 이게 다였다.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하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와 관련해서 다른 암환우를 도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이 출간되면 책을 기증하거나 수익금 일부를 기증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대표님과 소통을 할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평소 소통하던 단톡방의 환우 언니가 대표님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대표님께 나의 이런 생각을 전하자 뜻밖에도 대표님은 내게 온라인 독서모임의 리더를 제안해주셨다. 교사 독서모임, 학생 독서모임, 어린이 그림책 독서모임은 해봤지만 암환우 독서모임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당황했지만 나는 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3월부터 독서 모임을 시작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국어교사인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분야를 찾은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대표님은 추진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바로 모임 방식을 의논하고, 함께 읽을 두 권의 책을 선정했다. 책을 추천해달라는 대표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책은 전부 '암'이나 '투병'에 관한 책이었다. 암을 진단받고서는 건강에 관한 책,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육아에 대한 책만 읽은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좀 더 밝고, 일반적인 책을 추천해달라는 대표님의 주문에 나는 우리집 책장 앞에 서보았다. 학창 시절, 시집과 소설책을 끼고 살았던 문학소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대학 시절, 학교를 오가는 전철 안에서 내릴 역을 놓칠 만큼 소설책에 파묻혀있던 국문과 여대생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마흔을 앞둔 아줌마만 책장 앞에 서있었다.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병들었는데 책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문득 서른 살이 되던 해, 선물로 받은 김형경 선생님의 <천 개의 공감>이라는 심리치유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을 만나기 전, 방황하고 흔들리던 나를 잡아준 책이었다.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 이 책은 당시 소개팅을 했던 상대방 남자분이 내게 마음을 고백하며 선물로 준 책이었다. 그 남자와는 그 뒤 만나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선물한 에세이는 우리집 책장에 남아 젊은 시절의 추억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 번째 내가 고른 책은 남편이 내게 선물로 준 시집이었다. 밝은 책과 함께 한 권은 시집을 하면 어떻겠냐는 대표님의 제안에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넘겨 보았다. 첫 장에 적힌 남편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그대에게 시집을 줄 테니, 나에게 시집을 오시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멋진 말이다. 남편은 어떻게 이런 말을 생각해 냈을까?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기 전, 남편의 고백 편지에 연애를 시작했고, 중간중간 남편이 써준 시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편은 언어유희가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런 쪽으로 재치가 있었다. 결국 시집을 건네며 청혼을 했고, 그 후 이 시집을 볼 때면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음악도 그렇고 책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이 흘러나오던 그 시대의 추억이 아련히 생각나듯, 책도 그 책을 읽었던 그 시간과 공간을 품고 있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는 소개팅 남자는 지금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가 결혼할 때는 우리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힘들 줄 꿈에도 몰랐는데. 10년 뒤 내가 쓴 책은 나에게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10년 뒤 이 글을 읽으며 '10년 전, 내가 암에 걸렸었지. 그땐 참 많이 힘들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오늘을 추억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환우분들도 먼 훗날 책장 앞에 서서 이 책을 보며 '이 때는 참 힘들었었지.'하고 미소 지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이 모든 아픔은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 강인해질 것이라 믿는다.


 누구에게나 이런 젊은 날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책일지도, 음악일지도, 또 다른 형태의 것일지도. 어쩌면 암환자라는 테두리에 갇혀서 문득 그런 것들을 못 보고, 못 느끼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다른 환우들을 돕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 작은 불씨가 되어 내 마음에도 온기를 불어넣었으니 말이다.  


 나는 문학을 가르쳤던 사람이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문학을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던 그 숱한 나날을 왜 잊고 살았을까. 이제는 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싱그러웠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긴 긴 겨울이 가고, 계절에도 봄의 오듯이. 내 인생에 봄이 꽃처럼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해본다.


photo by Mink Mingle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액와막 증후군을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