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천에서 부산까지 초등가족 자전거 국토종주 이야기

by 엘라


"자갸~ 인천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여행할 때 자기 진짜 힘들었지?"

"응."

"근데 왜 힘들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그땐 한 가지 생각밖에 안 했어. 가족 모두 안전하게 여행해야 한다는 생각."

"종주 때 사진이랑 동영상 보면서 생각해보니 자기 혼자 모든 걸 다 했더라. 나랑 애들은 아빠 오리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주는 거 받아먹는 새끼 오리들 같았어. 그리고 그게 우리 가족이 살아왔던 방식이 아니었나 싶더라. 자기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자전거 앞 뒤로 짐을 실은 남편




2022년에 그랜드 슬램을 마치고 난 어느 날, 2019년부터 자전거를 탔던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국토종주 자전거 여행을 처음 시작했던 2019년 사진과 영상을 보며 깨달았다. 남편이 정말 힘들었겠다는 걸. 우리 가족의 짐은 모두 그의 자전거에 실었다. 가방을 가득 채웠고, 옆에는 비닐에 소지품 등을 넣어 걸기도 했다. 그것만도 부담스러웠을 텐데 길을 찾는 것부터 숙소와 끼니, 빨래까지도... 일정 중 해야 할 모든 것을 남편이 생각하고 계획했다. 우린 그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아이들은 초등 2학년, 4학년이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여행에서 부모를 따라 가는 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창피하게도 난 초등 아이들과 똑같이 남편만을 의지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




결혼 후, 나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남편에게 모든 결정을 맡겼다. 이사할 때, 옷 살 때, 물건을 살 때 등등 큰 결정부터 사소한 결정까지 모두 남편이 선택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책임 전가였다는 걸. 배려 같지 않은 배려, 알고 보니 책임전가가 습관으로 자리를 잡는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난 묵묵히 그를 배려했다.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였다. 일상에서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사는 일이 특별하지 않다. 어색할 일도 없다. 오히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게 낯설고 어색하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공간에서 그 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사 인분의 역할을 감당하며 새로운 경험까지 뚫어야 한다면 오랫동안 여행할 수 없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서서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감당할 줄 아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여행 후 돌아온 일상에서도 점점 바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능내역 인증센터





능내역을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역을 기점으로 공간이 분리된 거 같달까. 일단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걸어 다니는 사람도. 다음은 풍경과 소리인데, 여기서 부터는 인공의 소리가 거의 없다. 우리가 조용하면 세상이 조용하다.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타다 타다 들릴만큼. 이런 길만 계속 이어진다면 부산까지 가는 것도 문제없을 것 같다. 아이가 친구와 통화하면서 "난 갈 수 있을 거 같애."했던 말처럼 나도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능내역 인증센터





난 설거지를 할 때 고무장갑을 낀다. 맨 손으로 하고 나면 손이 거칠거칠해지는 느낌이 싫어서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끼기 전에 준비해 놓는 게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다. 결혼 초 설거지하는 게 참 싫었다. 그렇다고 다른 집안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게 중에 설거지가 제일 싫었다. 자주 해보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벽을 보고 혼자 서있는 게 지루해서였다. 길면 한 시간도 지나는 동안 눈, 코, 입도 없는 하얀 벽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벽이 뭘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설거지를 할 때마다 뭔가 모르게 아까웠다. 차라리 몸을 혹사시켜야 하는 힘든 일이거나 위험한 일이라면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고된 일도 아니고 가만히 서서 손만 움직이는 일이라 말똥말똥 깨어있는 내 눈, 코, 입과 뇌는 가만히 있질 못해 안달이었다. 이렇게 안달인 내 신체들을 잠잠하게 해준건 문명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드라마를 골라볼 수 있게 된 것. 난 잽싸게 설거지와 드라마가 컬래버레이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설거지할 때는 드라마를! 재밌는 드라마를 보면 설거지도 덩달아 재밌어진다. 설거지 시간 이재 밌어지려면 드라마 선별 능력은 필수다. 남편과 나는 이거다 싶은 드라마를 발견하면 서로에게 추천해준다. 취향이 달라 애매할 때도 있지만 추천해준 드라마를 보며


"오! 재밌는데." 하는 소릴 들으면

"그치 재밌지. 재밌지." 하며 본방사수를 할 때도 있다.








내가 추천했던 드라마 중 남편이 "오! 재밌는데." 했던 드라마 중 하나는 <호텔델루나> 였다. 아이유(가수 겸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인데 전생과 현생, 저승과 이승, 선과 악,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혹은 무섭게, 때론 코믹하게 그린 이야기다. 삶과 죽음을 다룬 드라마인 만큼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죽은 자가 저승으로 가려면 삼천교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고 나온다. 삼천교가 나오는 장면은 멀리 보이는 긴 다리에 사람이든 귀신인듯한 이들이 이동하고 있는 모양으로 나타냈다.







능내역을 지나가다 보니 [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양평 여행]이라고 양평에 왔음을 알리는 글이 쓰여있는 길이 나왔다. 잠깐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자전거 탈 땐 뜨거운 바람이라도 맞을 수 있는데 멈추니깐 진짜 더워요. 쉬지 않고 가는 게 낫겠어요."

아이들은 서둘러 지나가고 싶어 했다.


"그래, 그늘이 나오면 거기서 쉬자." 했는데 그늘 대신 긴 다리가 나왔다. 갈색 나무데크로 된 다리 위에 철골구조물이 터널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다리다. 터널 모양이라고는 하지만 지붕이 뚫려있어 다리를 건너는 내내 그늘은 없다. 철골 구조물은 멀리서 보면 금색인가 황토색인가로 색을 칠한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녹이다. 바로 북한강 철교였다. 예전에 전철이 다니던 곳을 복구하여 자전거와 보행자가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한다. 이 다리는 처음 지나가 보는데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다.









"오! 다리 멋있다. 사진 찍고 갈까?"

철골구조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작품 하나 건질 수도 있겠다.

"멈추면 바람이 없어서 안돼요. 얼른 그늘 찾아서 물도 마시고 쉬고 싶어요."

아이들은 바람을 맞기 위해 바람을 만들며 지나갔다.

"자갸 여기서 사진 찍고 가자."

뒤에 오던 남편은 자전거를 세웠다.

"근데 우리 여기 와본 적 있나? 왜 본 거 같지?"

"그치! 나도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호텔델루나에 나왔던 다리! 맞지? 맞지?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다리. 이름이 있었는데..."

우린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봤다. 이름도 다리가 나왔던 장면도. 그 다리가 맞다. 삼천교. 반가웠다.




북한강 철교에서




다리가 바뀐 것도 아닌데... 드라마의 삼천교가 떠오른 뒤의 다리와 그 전의 다리는 달라 보였다.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도 아닌데 이 다리를 지나면 다른 세상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고 다른 세상이 나온다면 시원한 얼음바람이 불어오는 세상이 좋겠지 ^^ ㅋㅋ 같은 사물이라도 의미를 부여했을 때와 아닐 때 사물의 가치는 달라지는 것 같다. 우린 의미 있는 다리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 아이들에게 전화가 왔다. 앞서 가던 아이들은 그늘을 찾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걱정했다는 아이들에게 드라마에 나왔던 다리였다고 알려주고 드라마 이야기도 했다. 내용을 모르는 아이들은 전혀 재미있거나 의미 있을 리 없는 이야기이지만 난 즐거워서 떠들었다. 아이들은 혼자서 즐거운 엄마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으려나.



씰룩이 엉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