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문화 vs 한국 문화
라트비아에서의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을 무렵, 나를 생각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 (?)이었던 걸까. 갑자기 회장님의 동유럽 방문이 예정되었다. 당시 입사 3개월이던 나는 '유일한' 기획 인원으로 회장님 보고용 보고서에 투입되었다. 이제 막... 경영 용어가 입에 익숙해지고 엑셀로 아주 단순한 보고서를 만드는 게 가능해졌을 때였다.
6월의 이 난리를 겪기 전까지
나는 라트비아 애들에게 꽤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마다 유쾌하게 인사해주는 애들. 내가 실수해도 웃으면서 그냥 그럴 수 있지~~ 하는 동료들을 보며 라트비아 애들은 참 여유가 넘친다~ 좋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6월의 회장님 방문을 준비하며,
구 소련 문화로 표현되는 라트비아의 문화와
빨리빨리로 축약되는 한국의 문화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뼛속까지 깨달았다.
각 법인 법인장들의 보고를 앞두고 본사에서는 거의 모든 부서에 자료를 요청했다. 영업, 마케팅은 말할 것도 없고 서비스, 물류, 그리고 인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서의 실적을 보고해야 했다.
매일 아침 회사 와서 메일을 읽으면 '지급' 'Urgent' 제목의 메일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내가 리포트 취합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매일 아침 라트비아 동료들에게 메일을 보내 요청을 하고, 해당 요청에 대해 팔로업을 하고 나면 정작 내 일은 오후 3시나 돼야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일이 많이 쏟아지면서 라트비아 인들과 한국인들의 work style 차이에 따른 갈등도 눈에 보였다.
우선적으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이 발트 3국의 직원들과 러시아 직원들은 늘 언제나 "여기까지만 내 책임이야" 하는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나는 marketing plan을 입력하는 직원이지, plan 결과를 보고 하는 직원은 아니라는 식. 정확히 job description 에 쓰여있는 일이 아니고서는 단 하나도 손대지 않으려 했다. 또한 문제가 생겨도 우선 한국 본사에 메일을 보내 놓고 거기서 자기의 할 일은 끝났다고 얘기했다.
- Dmitry, 저번에 요청한 Logistic 자료 말이야~ Direct Delivery비중이 어떻게 되는지 계산했어?
- 나는 자료를 다운로드하기만 했어. 그거 계산은 내가 하지 않아.
- 그래도 지금 필요한걸...
- 그럼 나 이거 본사에 메일 보낼게~ 내가 본사 담당자에게 메일 보냈어~ 얘가 회신 줄 거야. 나는 몰라.
이러한 업무 처리 방식이 한국인 boss들의 화를 불러오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추가적으로, 계속되는 업무에 불만을 가진 현지 직원들은 한국인 주재원들에게
"이걸 왜 해야 하는데? 나 지금 내 원래 작업들 하느라 바빠. 단순히 리포트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예, 제가 해보겠습니다.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하는 문화에서 2-30년을 일하고 라트비아로 파견 나오신 부장님들은 라트비아 인들의 대답을 듣고 가슴을 쳤고... 본사랑 전화통화를 하면서 "아 여기는 말이 안 통한다니까요!" 하며 목소리를 높이셨다.
앞서 말했듯, 말은 안 통해도 분위기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현지인들도 한국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눈치챘고.. 나는 일을 하다가 잠깐 커피를 마시기 위해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라트비아어 속에 'Kim... Park..'과 같은 한국인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적진 한가운데를 걷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